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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Sep 08. 2022

3. 오아시스 같았던 이 회사도 결국은 사막에 있었다.

저는 사투리를 고쳐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만.

내가 이 회사를 지원한 가장 큰 이유는 수평적인 조직문화 때문이었다. 적어도 성별로 차별하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성별, 나이 따위의 이유로 차별을 두지 않는 회사였다. 출산휴가도 편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해준다니. 회사가 꼰대를 배척하는 분위기인 것도 너무 좋았다. 내가 이런 회사의 직원이라니(감격)


1년에 한 번은 꼭 실시하는 사내 문화 교육과 성교육. 그리고 활발하고도 다양한 사내 활동들. 한눈에 봐도 성비는 여자 반, 남자 반이었다. 그리고 성별과 나이에 크게 상관없이 직함도 다양했다. 무엇보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직함이 아니라서 너무 좋았다. 메신저로 대화를 할 때도 말투가 친절했다. 지시가 아니라 “부탁드려도 될까요?”였다. 모두가 일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내가 찾던 천국이 바로 여기였다.


타지에서 왔다는 이유로 먼저 친해지려고 노력해주는 상사들도 좋았고, 같은 팀원들도 다 좋았다. 잘해주려고 애쓰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을 때도 많았고, 내가 이런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이 행복이 깨지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즐거웠었다. 회식이라면 질색이었던 내가 사람들과 밤늦도록 어울리고 있었다.


팀원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팀 사람들도 종종 말을 걸어주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우리 팀이 그나마 조용한 편이었고, 옆 팀은 종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게 일을 했다. 신기했다. 사무실 분위기가 이렇게 밝고 즐거울 수도 있는 거구나.


사소한 실수도 눈치 주던 전 상사들과는 달리 실수를 해도 하나를 배워가길 바라시던 팀장님을 존경하고 싶었다. 가끔 장난쳐도 업무를 많이 가르쳐주고 사소한 부분도 챙겨 주는 선배가 있어서 든든했다. 나는 여기에서 뼈를 묻어야겠다고 매번 다짐했다. 업무를 열심히 배워서 승진도 차곡차곡해나가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번씩 섬찟하긴 했다. 다정하고 친절하신 팀장님이 부모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여쭤볼 때도, 동생은  살이냐며 어느 학교를 다니냐고 여쭤볼 때도 꼰대 의례인 호구 조사가 아니라 나에 대한 관심이라 생각했다. 원래 회사 사람에게 사적인 영역은 1 알려주지 않는 나지만, 모든 질문에 성실히 답했고 남자 친구의 유무와 직업, 남자 친구의 거주지역까지 상세하게 답해드렸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든 적응해서 회사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내 환경이 부끄러울 것은 단 1도 없으니 모든 걸 얘기해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내 출신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대구가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이 없고, 내 사투리가 심하다거나 부끄럽게 느껴진 적이 단 1도 없었다.


너는 다 괜찮은데, 입만 열면 깨.
사투리가 심하거든.
사투리 좀 고쳐 ㅋㅋ


글로 써서 심각해 보였지만, 그땐 진담이던 농담이던 친한 사람이었기에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확고했다. 나는 사투리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 억양을 듣고 내 출신지를 바로 알아봐도 상관없었다. 주변에서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었고, 메신저로는 충분히 표준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사투리는 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나의 신념과는 달리 주변에서 서서히 고쳐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호구조사를 당할 때부터였을까? 내 행복이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긴 했지만, 3개월 정도밖에 가지 않을 거란 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얘기한 적 없는 다른 팀 상사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점심 식사자리에서 내 남자 친구 직업을 먼저 얘기할 때 당황하지 않은 척했다. 대구 출신이라는 이유로 동생에게 일베 하지 말라고 주의 주라는 장난 섞인 말을 들어야 했고(심지어 동생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내 적 없는 직장 동료였다), 처음 코로나가 대구를 강타할 때도 나도 모르게 눈치를 봤다. 아무도 당황하지 말라거나, 장난을 받으라거나, 눈치를 보라는 말을 한적은 없지만 나는 점점 움츠려 들게 되었다.


본사가 아닌 지옥철을 타야만 갈 수 있는 관계사로 자주 출근해야 하는 것도 점점 버거웠다. 관계사 직원이 본사 직원에게 텃세 부리는 상황이 점점 힘들었다. 가장 지치게 만든 건 누가 봐도 우리 팀에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과 억지로 친하게 지내라고 강요하는 팀장님이었다.


회식 때 관계사 직원에게 지역차별적인 발언과, 이직이 잦다는 지적질, 성희롱 발언 등 불편한 말을 들었을 때도 팀장님은 팀을 위해서 나에게 참아주길 바랬다. 나에겐 팀장님과의 불협화음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팀장님은 좋은 분인데 왜 정작 힘들 때 부당함을 참으라고 하시는 걸까? 여태 봤던 모습과 괴리감이 들어서 혼란스러웠다.


입사 동기에게 조언을 구해서 관계사 직원에게 직접 사과를 들었지만, 그 후 팀장님과의 사이는 점점 불편해졌다. 꼰대를 배척하는 문화,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회사에서 수없이 교육받은 것과 달리 왜 성희롱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불편한 언행에 대해서는 본사 직원이 아니라 징계를 내릴 수도 없고 서면으로 안내장 정도를 보내는 게 최선이라고도 덧붙였다.


깨달았다. 겉으로 보이는 회사의 모습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내가 참고 넘겼어야 했었을까?

내가 너무 예민한가?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밤은 점점 길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겪은 건 부당했고, 회사의 취지에 어긋난 것이었다.

오아시스도 결국은 사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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