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윤의 이야기

말라버린 이름 1. 윤

by 차혜원

윤의 전성기는 40대였다. 각 가정마다 에어컨을 설치하기 시작하던 시절. 윤은 에어컨 대리점을 운영하며 제법 많은 돈을 만졌다. 새 차를 뽑아 주말마다 가족을 태우고 명소를 도는 게 그의 낙이었다. 나름 박식했던 윤은 아들과 딸에게 명소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퍽이나 자상한 아버지 행세를 했었다. 친구들과 가족 모임을 가지며, 친구의 자녀들에게도 만날 때마다 만 원씩, 기분 내키면 오만 원씩 용돈을 쥐여주기도 했던 용돈 삼촌이었다.


떵떵거리는 것까진 아니어도 윤은 나름 성공의 길을 걷고 있노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장은 변하고, 커다란 브랜드의 기술 혁신과 공격적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윤이 운영하던 대리점 브랜드는 ‘저가 에어컨’이라는 이미지에 갇혀버렸고, ‘고급화’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결국 손님마저 끊겼고, 직원들을 줄여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설치와 수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대리점이 급기야 폐업하는 지경이 왔다.


그렇다고 그때도 모든 대리점이 문을 닫는 건 아니었다. 중고 에어컨 가게로 전향해서 운영을 이어가거나, 에어컨 수리, 이전, 설치를 하며 운영을 계속하는 가게들도 있었다. 단지, 윤이 ‘잘 나가던 사장’에서 ‘파리 날리는 사장’으로 변화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미리 폐업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후로도 윤은 다음 사업 구상을 하거나, 어디 좋은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기 일쑤였다. 그러나 무엇하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정의 생계는 그의 아내 몫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한동안 윤은 집에 들어가질 않았다.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밖에서 밤을 지새웠다. 어쩌다 집에 가도 잠만 자거나 옷만 갈아입고 나올 뿐.


어느새 아이들과 대화도 아내와의 대화도 끊겨 있었다. 집안의 웃음소리마저 윤이 귀가하면 뚝 끊겼다. 윤은 그것이 몹시 불쾌했다. 더 이상 가족의 느낌이 없었다. 내가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가며 애쓰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 술에 취해있던 날.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은 벌써 네 번째 바뀌어 있었다. 독채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월세로, 가게에 딸린 집에서 남의 집 사글세로…. 남의 집 대문을 열고 왼쪽으로 난 쪽길을 가면, 작은 철문이 나온다. 집에 들어서기 위한 작은 철문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몸을 더 구부리게 했다. 땅에 얼굴이 닿을 것처럼 들어서서 보이는 일 평 남짓한 부엌은 윤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보안 장치랄 것도 없는 나무 문을 열자,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과 아내가 보였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저 무식한 여편네는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다. 저 여편네가 아니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저것들이 다 짐이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어떤 덩어리가 거칠게 쏟아졌다. 이미 윤은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있는 힘껏 가족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정이가 화들짝 놀라 깨며, 동생 산이를 끌고 뒷방으로 갔다. 윤의 아내만이 홀로, 그의 짐승 같은 날것의 폭력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날이 아내를 향한 폭력의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은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한번 시작된 폭력이 날로 더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술과 폭력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내가 사라졌다.



아이들은 친척 집에 맡겨졌고, 윤은 돈을 벌기 위해 타 지역의 회사를 다녀야만 했다.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서 돈 버는 기계처럼 한동안 회사만 다녔다.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길을 걷다 무심코 밟은 늪에 점점 잠식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허우적거릴수록 빠저 드는 늪에 윤의 가슴까지 잠기자 더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 왔다.


그렇다. 이번 생은 실패다. 실패자가 되어 버렸다. 돌파구가 없어 보였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아내로부터 양육권에 대한 소송이 들어왔다. 윤은 양육비를 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이들의 양육권을 포기했다. 그것만이 윤의 숨통이 트이는 일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혼자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다. 그는 늘 ‘가족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가장 소중한 건 그 자신이었다.


아이들을 아내가 데려가고 많은 세월이 흘러, 큰 딸이 결혼하던 날이었다. 딸은 그래도 윤을 사랑했다. 딸의 결혼을 계기로 윤은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뿐인가. 사위까지 얻게 되어 마치 가족이 다시 윤에게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딸의 결혼을 친구들에게 자랑했고, 착하고 성실한 사위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과거가 모두 씻겨져 잊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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