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이름 1. 윤
코를 자극하는 낯선 냄새에 윤이 눈을 떴다. 등과 엉덩이가 너무 따끔거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윤은 알지 못했다. 그저 피부의 통증만 느껴졌다.
"형님!! 정신 드십니까?"
낯선 노인이 윤에게 달려든다.
깜짝 놀란 윤이 피하려 했지만, 손만 들리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누구요?'
윤이 노인에게 물어보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윤의 목소리가 아닌, 바람 소리만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당황스러웠다. 다시 말해본다.
"후‥호."
역시나 바람 소리만 나온다. 앞의 노인이 윤을 측은하게 쳐다본다.
"성님, 나 누구요?"
"…"
윤은 말을 포기하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르겠단 표시를 했다.
"나요. 나. 철이! 성님 동상 철이!"
"…"
미동 없는 윤을 향해 철이라는 노인이 눈물을 흘려댄다. 저 노인이 동생이라니 무슨 일인가…. 생각났다. 내 동생 철이. 윤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커다란 두 눈으로 철이를 바라보며 내가 너를 안다고, 철이 넌 내 동생이라고 열심히 표현해 보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안 나와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관식이 성님이 발견 못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러요. 흑…. 나가 들여다봤어야 했는디… 미안허요. 성…. 관식이 성은 잠깐 나가셨소. 지금 애들이랑 부르고 있응께 쪼매만 기다리쇼. 나가… 성 볼 면목이 없소.”
철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또다시 흐느꼈다. 흐느끼는 철이의 모습에 뭐라도 해보고 싶지만, 윤은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온 살갗이 따갑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 버리고 싶다. 그래. 바다. 바다로 가고 싶다. 어머니의 품 속 같은 바다로 들어가고 싶다.
***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어머니댁 앞바다이다. 누군가 뒤에서 윤을 부른다.
“아빠….”
정이다. 내 딸. 정이. 정이가 울고 있다. 윤은 정이를 불러본다. 반가운 그 얼굴. 내 어린 딸. 정이. 내가 지켜야 하는 소중한 내 보물. 윤은 정이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인다.
정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찡그린 눈에서 원망이 뚝뚝 떨어져 나온다. 그것이 정이의 옷을 시커멓게 물들인다. 윤은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니, 미안하다는 그 마음이 목구멍으로 오르질 않는다. 지금의 마음도 미안함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서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정이는 윤을 미워했다. 제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윤이 싫다고 했다.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정이가 지금 윤의 앞에서 억울함과 원망이 뒤섞인 울음을 울고 있다.
어느새 온몸이 시커멓게 물들어 버린 정이의 얼굴에 따뜻한 빛이 감돌기 시작한다. 정이의 얼굴부터 본래의 색이 돌아오자, 힘겹게 입을 뗀다.
“엄마한테…, 엄마한테만이라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정이의 뒤로 아들 산이와 아내가 보인다. 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다. 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내를 돌아보니 함께 울고 있다. 저 눈물이 용서의 눈물일까? 원망의 눈물일까? 제발 용서의 눈물이길 바란다. 윤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 손을 들었지만 왜인지 눈물이 닦이질 않는다.
파도가 철썩인다. 그때의 나는 가족을 보지 못했다. 내 안에 넘쳐난 것은 성공과 친구였다. 그저 가족은 짐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옆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 스스로가 부끄럽다. 내 과거가 사라지면 좋겠다. 사랑했던 기억만 가족에게 남는다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진정 사랑한 때가 있었나? 있었다. 분명, 사랑했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지…, 이젠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바위 위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윤의 머리 위로 덮친다.
파도가 내 죄를 씻어 줄까. 그 파도와 함께, 나도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