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이름 1. 윤
아이들을 아내가 데려가고 많은 세월이 흘러, 큰 딸이 결혼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딸은 그래도 윤을 사랑했다. 딸의 결혼을 계기로 윤은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뿐인가. 사위까지 얻게 되어 마치 가족이 다시 윤에게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딸의 결혼을 친구들에게 자랑했고, 착하고 성실한 사위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과거가 모두 씻겨져 잊혀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느낌이었다. 윤의 가정이 윤의 소유라는 그 느낌. 윤에게 가족은 ‘소유’에 불과했다. 아내는 그저 부리는 사람이었고, 자식은 잘 키워 놓은 훈장이었던 거다.
정작 그들을 위해 한 것이라고는 이혼이 전부였던 사람이. 그들 모두가 제것인양 착각을 하고 만 것이다.
그 착각으로부터 윤의 실수가 반복되어 버렸다.
윤은 기분 좋게 술 한잔 마시고, 아니, 술을 마시지 않은 날에도. 정이와의 통화에서 툭하면 아내를 하대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정이 너가 산이를 잘 챙겨야 한다. 느그 엄마가 뭘 알겄냐. 암것도 모르는 여편네가 애를 어떻게 키워….”
정이는 그 모습이 지독히도 싫었다. 이제것 자신들을 키운 것은 윤이 아닌, 엄마였다. 본인은 혼자 술에 취해 살 동안, 정이의 엄마는 밤낮으로 일해가며 정이와 산이를 키워냈다. 정이는 그런 엄마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윤이 자신의 아버지라서 사랑하는 것과 엄마의 희생을 아프게 여기는 마음은 별개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윤의 입에서 저런 발언이 나올때마다 무언가 명치에서부터 가슴까지 꽉 들어차서 눌리는 듯한 답답함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를 임신하고 길을 걷던 무더운 여름이었다. 태양이 뜨겁게 타올라 아스팔트가 달아오른 철판 같다고 생각하며, 가로수의 나무 그늘은 찾아 밟고 있었다.
불러오는 배를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이마에 손그늘을 만들고 있는데, 윤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 아빠.”
“잘 있냐? 뭐하느라 바쁘다고 연락도 없냐?”
“병원 갔다가 솔이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고 있어.”
“아따, 배가 솔찬히 불렀겄다. 산달이 언제냐?”
“11월. 11월 마지막 주.”
정이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으며 전화하는 것이, 숨이 차올라 버거웠다. 어느새 등과 겨드랑이에 땀이 흥건하게 적셔있었다. 잠시 그늘에 앉아 있고 싶었지만, 큰아이 하원시간이 다가와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윤이 정이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11월이면 아적 멀었네잉. 그라믄 별로 힘들 것도 없겄구만. 느그 아빠 담배나 피게 담뱃값이나 붙여라!”
윤은 정이와 산이에게 돈을 보내달라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윤은 혼자 벌어 혼자 쓰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저 정이와 할 말이 없어서 담뱃값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정이도 이것이 아빠의 장난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느때와 다르게 그날은. 그동안 명치 어딘가에 막혀있던 무언가가 식도를 빠르게 통과해서 입으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아빠, 심심해? 전화 왜 한 거야? 할 말 없으면 전화하지 마.”
“…이…자식이.”
“왜? 아빠가 아직도 호랑이처럼 무서운 줄 알아? 안 보면 그만이야. 이제 우리도 다 컸어.”
“씁! 너… 이노무 자식이. 아빠한테 뭔 말뽄새야! ”
“내 말본새가 뭐 어때서. 아빠가 매번 엄마 하대하는 거. 우리를 아직도 휘두르려고 하는거 다 그만해. 그동안 엄마가 우리 다 키웠어. 나 예전부터 이 말 하고 싶었어. 아빠는 엄마를 항상 무시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빠보다 엄마가 더 소중해. 우리가 아빠라고 부른다고 무슨 소유인양 굴지 마. 아빠야말로 말 바르게 해. 세월 지나도록 사과 한마디 못 하고, 아직도 술에 절어 사는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아? 어떻게 부모가 그래? 나는 내 자식 보기 부끄러운 짓 하기 싫던데….”
“내가 뭘 그렇게 부끄러운 짓을 했냐?”
“하…. 변하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구나”
“……”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래, 참 잘나셔서 똑똑하다. 잘 먹고 잘사세요. 끊읍시다.”
정이는 어느새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리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았다. 언성을 높이느라 이목을 샀는데도 부끄러움보다 개운함이 일었다.
진작 뱉었어야 하는 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귓가에 앵앵대던, 못된 지 아빠 편만 든다던 엄마의 핀잔 소리가 그쳤다.
모르겠다. 안 보면 그만이다. 나도 이제 내 가정을 지켜야 한다.
정이는 다시 어린이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정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후련하다고 생각했던 마음과 다르게 눈물이 계속해서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 ***
“투둑. 투둑. 투둑.”
희미하게 빗소리가 들려 온다. 병원도 바다도 아니다. 윤의 작은 집. 윤은 여전히 이 집에 남아 있다. 더 이상 살갗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관식이 자신을 데리고 병원에 간 것은 그저 살고자했던 윤의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윤은 깨달았다.
장맛비 소리가 세차게 창에 부딪힐때면, 희미해지는 기억이 선명히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몸은 괜찮냐고, 힘들진 않냐고 왜 못 물어 봤을까….’
정이와의 마지막 대화가 윤의 가슴을 옥죄여 왔다. 생각해 보니, 부끄러운 사람이 맞다. 사실은 나도 나의 인생이 실패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단지 인정하지 않았을 뿐. 내가 인정하면 그들과는 다시 만나지도 못할 것 같아서 뻔뻔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살아난다한들, 몸도 못가누는 나는 그들에게 짐만 될 것이다. 그냥 이대로 내가 사라지는 것이 그들을 위하는 마지막 선택인 것 같다.
멀리서 전화 벨 소리가 울려 온다. 받을 수도 없지만 받고 싶지도 않다. 지금의 고독과 외로움이 나의 죄를 덜어내는 기회인 것 같다.
마지막 힘을 모아 눈을 떠서 집안을 바라봤다. 불 꺼진 전등 옆으로 갈색 얼룩이 보인다. 언제부터 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얼룩이 점점 커져서 이 공간을 먹어버리는 것 같다. 그 얼룩은 메마름을 넘어선 공허다. 이제껏 뭐하며 살아 온 것인가….
몸의 감각이 점점 사라진다. 손끝과 발끝을 꼼지락 할 기력 조차 사라져 버렸다. 계속해서 몸이 녹아내린다. 땀인지 진물인지 모를 것이 흥건한 바닥에 윤의 몸도 뒤엉켜 섞여버린다. 점점 가라 앉는다.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지하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땅속으로, 지하수를 타고 바다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