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이름 1. 윤
7년. 윤과의 연락을 끊고 지낸 지 자그마치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정이는 윤을 정말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원래부터 아버지란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제발, 너를 위해 아빠를 만나봐…."
절친한 동네 언니인 미현이 정이의 손을 붙잡고 말을 이었다.
"나도, 나도 아빠가 너무 미워서 안 보고 살았어. 그런데, 내가 애를 키워보니 이해가 되더라. 얼마나 고단하면 그렇게 술을 마셨을까 이해가 되더라고."
"언닌 그래? 나는 내가 애를 키워보니 더 이해가 안 되더라. 어떻게 애를 키우는 부모가 그러고 살았는지 이해가 하나도 안 되더라고."
정이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윤을 위해 흘려줄 눈물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미현이 정이의 등을 토닥였다.
"정이야. 너는 그걸 알고 그렇게 안 하잖아. 너희 아빠는 그걸 몰라서 그런 거야. 그러니 아빠가 불쌍하지."
"… …"
"나도 우리 아빠가 너무너무 미웠는데, 아빠가 치매에 걸리고 나니까 조금씩 불쌍한 마음이 들더라. 아등바등 살다가 그렇게 어린애처럼 천지 분간 못 하는 모습에 아빠가 너무너무 짠하더라. 그러니 안되던 용서가 되더라고."
"… …"
정이는 아무런 말 없이 미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미현의 아버지는 오랜 세월 교회 집사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오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은 엄격히 분리된듯했다. 그는 툭하면 술에 취해 있었고, 윤처럼 가정폭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족들과 살갑게 지낸 것도 아니었다. 말년에는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강요받고, 동네와 멀리 떨어진 사무실에서 경비로 근무하면서 그의 음주량은 나날이 늘어났다. 그러다가도 교회에서는 신실한 집사인척 사람을 대하는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이 미현은 신물이 날 정도로 싫었던 것이다.
미현이 다시 정이의 손을 잡으며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이야. 아빠를 용서하니, 내가 행복해. 살 것 같더라."
미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덩달아 정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어. 생각해 볼게. 근데 난 아빠랑 연 끊고 살아도 아무렇지 않아. 오히려 지금이 편해."
"너, 아빠 치매라도 걸리면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너, 아빠 장례식에서 안 울 것 같아? 난 너를 위해 용서하라고 하는 거야. … …. 아빠 떠나고 나니, 내가 모진 말 했던 것만 생각나. 그게 나를 너무 옥죄더라. 그래도 살아계실 때 아빠랑 회복해서…, 그래서 지금 살 수 있는 거야."
"그래도 나는 후회 안 할 것 같은데?"
후회하지 않을 것이란 말과 다르게 정이는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새 숨까지 가빠진 정이가 미현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내가…, 후회… 한다면, 사과받지 못해서…. 흑. 후회하는 거겠지. 흑흑. 치매든… 죽음이든… 사과도 못 받는 처지가… 억울해서 후회하고 우는 거겠지."
"으이그. 지금도 엉엉 울면서…. 으휴…."
미현은 정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푸릇한 생명이 피어나는 봄이었다. 아파트 놀이터 구석. 연둣빛의 새싹이 가득 돋아나는 나무 아래 벤치에서 두 여자가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있다. 서럽게도 울어대는 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대도, 두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 놓아 울어댄다.
그저 이제는 그만 용서하라고 말하려던 것이, 정이의 마음에 이입되어 미현도 함께 목 놓아 운다.
*** ***
미현과의 대화로 정이는 계속해서 묻어두고 있던 윤이 생각났다.
용서. 부쩍 최근에 부모님 상을 당하는 지인들이 많아졌고, 용서와 부모에 관한 글이 정이의 눈에 많이 들어온다. 이제 윤을 용서해야 한다는 하늘의 계시 같았다. 미현의 표현에 따르면 성령님의 부르심이란다.
윤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던 정이는 미현을 따라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배의 순서가 너무나 아리송하고 어색해서 불편한 마음이었다.
다섯 번이나 갔을까. 어느 날 주일 설교에 부모의 사랑에 관한 주제가 나왔다. 평소라면 부모의 사랑이란 정이에게 자녀들을 생각나게 하는 주제인데, 그날은 윤이 떠올랐다. 윤에게 자신도 사랑받는 자녀였던 시절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비록 엄마를 아프게 한 폭력범이 맞지만, 나를 사랑해 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 정이에게는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 예배는 목사님의 설교 후, 찬양과 축복 기도로 예배가 끝났다. 그런데 그날은 다 같이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기도의 방법도 소리 내어 기도해 본 적도 없던 정이의 입이 열리며, 정이도 그날 처음으로 자발적인 기도를 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가 사과했으면 좋겠어요. … …. 하지만 용서하고 싶어요….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움과 사랑이 뒤섞여 있는 감정이 눈물과 함께 쏟아졌다.
그때, 눈을 감고 기도하던 정이의 마음에 환상이 보였다.
정이의 눈과 입에서 나오는 무어라 단정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정이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러더니 그 감정들은 점점 어두운 색이 되어 정이를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검은 감정에 딱딱하게 갇혀버린 정이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라고 말하자, 순식간에 환한 빛이 정이를 감쌌다. 누군가 정이를 따뜻한 빛으로 꼭 끌어안아주는 듯했다. 그 빛으로 인해, 갇혀있던 어두운 감정들이 정이의 얼굴로부터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사라지자, 정이의 앞에 윤이 있었다. 정이는 윤에게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환한 빛이 정이의 마음으로 들어와 정이 안에 가득 채워졌다. 정이는 평온함을 느꼈다.
눈을 뜨니 정이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교회 예배당 안에 있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축복 기도가 이어졌다. 평소와 같은 축복 기도가 목사님의 두 손을 타고 정이에게 따뜻하게 부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