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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Sep 12. 2023

사회적 맥락 내, 개인적인 '아픔'

<아프면 보이는 것들>을 읽고

"아픔이란 무엇인가?"

"아픔이 어떻게 정의되는가?"

"아픔이 어떻게 개념화되는가?"


 '아픔'이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온전히 개인적 일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면 당연히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개인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아픔'의 사례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례 기준으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아이없음의 고통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게 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가 달라지는 것은 물의 흐름과 비슷합니다. 처음엔 빗물로 시작해서 강물이 되고 바다에 갔다 다시 수증기가 되는 여정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아이가 태어나서 새로운 관계가 생길 수도 있지만 아이가 없다고 해서 새로운 관계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파괴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없음의 새로운 관계가 아직은 공고하지 않고 실존적 차원에서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관계의 단절로 이해될 것까진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는 일은 어머니에게 아이로 머물러 있던 일방적인 관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이 어머니가 됨으로써 관계의 순환을 이루고 세상을 향해 존재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관계를 바탕으로 태어나는 우리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보내는 일은 기존의 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과거 및 현재의 관계와 미래의 관계를 응축하고 있는 존재이며 아이의 탄생은 그런 관계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인 것이다. 즉,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관계가 생기는데, 이는 백지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다. p.115

잉태하고 출산하는 경험이 다름 아닌 가장 원초적인 관계성을 의미하고 거꾸로 아이 없음이 관계성의 단절임을 고려하면, 난임은 의학적으로는 생식 계통의 이상으로 정의되지만, 실존적 차원에서는 관계의 단절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p.116


*법이 결정해주지 못하는 것들


 법은 최소한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역할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주체가 달라져왔기 때문에 예전에는 종교가 하던 일을 이제는 의학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AI가 죽음의 정의를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게 되었다는 것은 죽음을 정의하는 근거가 의학 지식에서 나오게 되었고 죽음을 선언하는 주체가 의료 전문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죽음이 영혼의 문제였기 때문에 종교 전문가가 임종과 장례를 주재했다. p.147


*의료화된 근대성과 일상화된 의료화


 프로이트가 했던 공헌 중 하나는 심리치료의 시작을 만들어준 일일 것입니다. 패러다임 변화로 이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만큼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프로이트 전에는 몸과 마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의 원인은 몸에만 있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프로이트 이후로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어 마음에 문제가 생겨도 몸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의료화가 지식-권력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내 몸이 권력을 통해 몸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이름을 가지게 되고 마음은 그 지식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권력의 주체에게 관리되어 버리는 상황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의료가 권력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BMI와 같은 지수는 표준 골격 형태를 정해놓고 그 안에 수치를 정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마다 타고난 몸의 형태가 너무 달라요. 누군 골격이 굉장히 커서 처음부터 근육량과 뼈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저 같은 사람들은 워낙 뼈가 가늘고 근육이 없는 몸이거든요. 그럼 BMI를 측정하는 것의 기준이 처음부터 다르게 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말이 되지 않잖아요. 예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는데 마치 문과를 타고났는데 이과를 가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최근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에서 "존재론"을 내세우는 것은 내추럴리즘이 상정하는 강력한 인식론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 중심주의는 주체의 인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형이상학이다. 그만큼 주체 밖 존재들의 입지는 약화된다. 주체 중심주의의 인식론 존재론의 불균형을 균형 잡기 위해서 존재들에 대한 관심을 "존재론"적 전회는 촉구한다. 하지만, 근대 주체를 체화한 국민국가 의료 체계와 생의학은 여전히 인식론이 강력한 체계다. 그 속에서 몸의 행위성은 곧잘 침묵된다. 지금 시대에 의료화는 사회적 문화적 의료적 문제이면서 형이상학의 문제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의료는 몸과 내면을 분리하는데, 우리 자신의 존재에서 그것은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 이후 의료화 문제의 기저에 존재하는 내용이다. p.213-214


*무엇이 사고를 사회적 참사로 만드는가


세월호 참사의 핵심적인 문제는 한국 교육제도에 있다. 참사의 문제를 국가 무능의 문제, 언론 거짓의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한국 교육의 문제이다. p.236


 세월호 참사의 핵심적인 문제는 어른에게 있다고 바꾸고 싶습니다. '가만히 있어라' 이렇게 말한 것도 사실 맞지만 어른들이 세월호에 대한 후속처리를 하면서 보여준 일련의 행정처리도 마찬가지 맥락에 닿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원고에 명예 졸업까지 교실을 그대로 두겠다는 것에 대한 논의를 그 학교에 다니는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은 하나도 듣지 않고 학교도 다니지 않는 어른들이 자신들의 논리만 앞세워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 질의를 할 수 있는 전제는 누군가가 계몽의 대상이 아닐 때 가능할 것입니다. 배움이 필요하기만 한 아이들이 대체 질문을 하는 것이 어떤 함의를 가지게 될 것인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반항이나 다른 방향으로 수업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의 가능성이나 이미 습득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부분은 무시하고 아직 덜 배운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모든 결정이나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고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습득했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말을 하지 못하다가 20대에 갑자기 말을 하라고 하니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습니다. 그렇게 큰 20대가 이제 어른인데 아이들을 위한 어른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 어떤 어른으로 만들고 싶어서 이런 교육을 하고 있는지 지금의 어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진정 모르는 것인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나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름표


어려움은 가변적이고, 보편적이며, 관계적인 특성을 가진다는 점이 중요한데, 이 특성은 장애 개념의 특성과 대비되는 점이 많다. p.255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마치 중세 시대의 유대인처럼 가능성을 가둬두고 사회가 원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게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보입니다.


*'성스러운 몸'과 '무의미한 몸'


스스로의 손상에 대한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탈출하여 손상과 몸의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했던 상이군인들에게, 국가로부터 부여된 '성스러운 몸'담론은 낙인을 지움과 동시에 국가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상이군인들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나 과잉 보수화된 상황은, 이런 국가주의와 성스러운 몸이 결탁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변화를 통해 굴절되어 더욱 급진화되며 '아픔의 국가주의화'에 기여하게 된다. p.309-310


 지금은 과연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물론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전쟁 이후에 외상 후 장애 치료가 되지 않아 문제가 있던 사람들은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졌다가 사회적인 문제를 안고 시한폭탄처럼 살아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실제로 시한폭탄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겁니까.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한 행동만 하는데 그것은 근시안적인 대처인데 금붕어처럼 역사를 배우고도 그것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시대를 지나 의료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예전에는 죽음을 필두로 종교와 가까운 직업을 굉장히 많이 선택했는데 지금은 의료가 주축을 이루면서 의사를 지망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이 사회적인 현상의 결과물이라고 느껴집니다.


 지금 시대에는 용서와 반성, 그리고 제대로 된 지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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