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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일원이 되는 첫걸음

여덟 번째 답장

by 태양이야기

유정님에게


이곳의 생활을 마무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올 때는 혼자였는데 뱃속의 새 생명과 함께 떠나게 되었네요. 낯선 이국에서 경험한 첫 임신은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말이 통하지 않아 그동안 철저히 이방인으로 살았는데, 임신으로 둥글게 솟은 배 덕분에 현지인들과 무언의 교감을 할 때면 언어를 뛰어넘는 신비로움을 체험해요.


그렇지만 3개월 간의 지독한 입덧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죠…! 기후도, 음식도 전혀 맞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외국어가 불편하게 느껴져 더 이상 좋아하던 영화를 볼 수 없을 때는 임신이 가져오는 변화가 두렵기까지 했어요. 기존의 나라는 사람을 지탱하던 가치관, 취향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인격이 들어선 기분…… 하지만 새로운 자신을 발견해 가는 기쁨 역시 있었죠. 학습된 건강상식과 공포는 깡그리 무시한 채 라면과 아이스크림에 마음껏 탐닉하는 자유,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며 싫은 것에는 아이처럼 곧바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솔직함……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저변에는 아이를 위해 기꺼이 나를 바꾸고 내려놓겠다는 조용한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또는 이참에 나를 파괴하고, 아이와 함께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


그동안 유정님과 함께한 모임에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읽었죠. 입덧 중의 독서란 현기증과 짜증을 증폭시키며 집중력은커녕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이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어요. 파괴와 재생의 에너지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게 해 줬거든요. 또한 여성이라는 것, 임신을 한다는 것, 본능과 도덕과 의무라는 것에 대해서도요. 비록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성실하게 넘기며 읽기보단 간신히 인내하며 읽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집어던졌다가, 다시 펼칠 때는 맨 뒤부터 또는 아무 데나 펼쳐 읽기를 반복하는 두서없고 광폭한 독서였지만…… 그러다가 어떤 부분에 매혹돼서 한동안 집중해서 읽고 나면 문득 작가가 천재라고 느껴졌어요. 무려 입덧을 잊게 하다니…!! 물론 10분, 길어야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임신을 하며 독서로부터 많이 멀어졌어요. 독서뿐 아니라 영화나 다른 예술에도 별다른 흥미가 솟아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됐어요. 뉴스는 읽을 때마다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서 전혀 보지 않았어요. 대신에 보다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것, 빠르게 채워지는 원초적인 즐거움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어요. 음식, 잠, 안락함, 쾌적함, 극도의 이기주의와 히스테리. 기분 좋아지고 싶을 때면 넷플릭스에 들어가서 평소에 안 보던 로맨틱코미디와 애니메이션을 봤죠. 주변에서 많이들 추천해 준 사랑의 불시착과 일타스캔들, 사내맞선을 정말 재밌게 봤어요. 또 전에는 전기세를 비롯한 갖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리 더워도 집에서 선풍기만 틀고 에어컨을 거의 안 틀었는데 요새는 고민 없이 바로 에어컨을 틀어요. 이렇게 쉽게 편리하고 즐거울 수 있는 생활방식에서 내가 많이 멀어져 있었구나, 또는 쾌락을 너무 고차원적인 것에서만 찾으려 했구나, 그것은 무엇 때문이며 과연 나한테 어울리는 방식이었나, 지나치게 어렵고 복잡하게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한 번 돌아보게 됐어요. 인생을 풍족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측면 중 나는 “즐거움”의 코드가 많이 부족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죠. 특히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마치 오늘만 사는 것처럼 신나는 음악과 춤과 즐거움이 가득한 이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더욱 대비가 되었어요. 인생을 더욱 즐기고 싶다, 그렇다고 행복에 대해 고찰하거나 지속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대신, 그저 지금 이 순간 기분 좋고 즐겁고 싶다…… 입덧이 끝나면서 마치 잠시 마법에 걸렸던 것처럼 다시 원래의 관성적 사고방식과 책을 읽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때의 그 강렬한 충동과 욕구는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네요.


첫 임신이라 궁금한 것도 두려운 것도 많아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며 흥미로웠던 점은 임신은 보편적 경험이라는 것이었어요.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주수별 증상이나 태아의 발달속도가 어느 임산부나 대동소이하다는 점에 놀랐죠.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은 경험자의 후기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놀라울 만큼 사소한 부분까지 공감하고 일치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입덧이 끝나는 시기, 입덧 중에 당기는 음식과 싫은 음식, 배가 솟아오르는 시기, 숨이 차고 부종이 생기는 시기, 태동이 느껴지는 시기…… 그동안 차이와 개성화에만 몰두했다면 임신은 우리는 모두 보편적 메커니즘과 특성을 공유하는 동지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경험이었죠. 모든 경험 중 임신이 나와 타인의 거리가 가장 근접하게 좁혀지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살갗 아래 타인이 숨을 쉬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공감하며,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통합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이기적 본능과 욕구에 대해서는 오히려 솔직하고 주장이 강해지는 경험…… 임신을 통해 비로소 내가 “세상의 일원”이라는 감각을 획득했다고 표현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민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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