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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Oct 23. 2023

시선 속에 갇힌 불안

<구토>를 읽고

 <구토>는 배경지식 없이 읽어도 되는 책으로 일상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글입니다.


 최근에 남미작가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어요. 로베르트 볼라뇨와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였습니다. 유난히 배경지식과 공부를 해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어찌 보면 불친절하게 로베르트 볼라뇨가 쓴 책이었습니다. 이와는 정말 정반대로 일상적인 상황에서 개인의 생각을 관념적으로 적어나가는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의 책을 읽었거든요. 다분히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후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구토>를 읽으면서 남성이 쓴 책에서 관념적인 글쓰기를 했던 사례를 발견한 것 같아 반가웠어요. 단지 관념적인 글은 수월하게 읽히지 않아 이해를 제대로 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생기긴 했어요.


 보통 책 제목을 읽고 싶지 않게 짓는 경우가 흔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실존주의를 알게 되고 <제2의 성>을 읽은 후, 장폴 사르트르에게 관심이 생겼어요. 무려 2년 전인데 그동안 관심만 있지 읽지 못했다가 제목만 인지하고 있었거든요. 막상 읽으려니 대체 제목을 구토로 지었을까, 모르는 사람이라면 절대 사지 않을 책 아닐까요. 과연 실제 구토의 상황을 표현하는 건지가 책을 읽기 전에 궁금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마음이나 몸의 상태를 구토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서 쓴다고 느껴졌고 과연 난 언제 구토를 느끼는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누구나 변합니다.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구토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래서 내가 주의하지 않는 사이에 무수한 작은 변화들이 내 안에 축적되다가, 어느 날 말 그대로 혁명이 일어난다. p.21


 아니면 자연적인 돌멩이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나를 비교하게 되었을 때 구토가 나오는 것일까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카페에서 구토가 나오는 것은 주도적인 상황이 아니라 수동적인 상황에 대한 불편함일까요. 그러던 중에 음악 안에 있는 순간 구토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아무것도, 세상이 무기력하게 주저 않아 있는 이 시간에서 비롯되는 그 무엇도 이 음악을 중단시킬 수 없다. p.60


 구토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일까요.

어떤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 그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이 불안감의 근원은 카페 마블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p.184-185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안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데 '나는 존재한다'라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강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p.234) 롤르봉씨를 존재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존재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생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이야기하면서(p.288) 인위적인 사물들이 너무 가까운 것을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p.295). 구토는 결국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p.295).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죠.


 사회적으로 정의되어 버린 나는 사회적으로 정의된 물건들과 상황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실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사회적으로 정의되어 버리는 것이 나쁜가 생각해 봅니다.


그것들이 변하고 있다가 내 눈에 들키면, 변신을 멈출 것이기 때문이었다. p.187


 위 문장을 보고 바로 양자역학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고 모임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양자역학에 맞춘 결론이 떠올랐어요. 로캉탱은 continous 한 인간인데 district 한 사람인 것으로 정해질 때 구토를 느끼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자가 보지 않으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대상이 보이지 않다가 관찰자가 보는 순간 대상의 위치가 확정되거든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하나로 특정 지을 수 없는데 어쩔 수 없이 나도 누군가를 혹은 누군가가 나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리기 마련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관찰자의 시선이 유독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면 나 자신을 찾기 위한 불안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그와 동시에 구토가 찾아오게 되죠.


 '완벽한 순간'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이 맞춰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완벽한 순간'이 될 수 없는 거죠. 일례로 안나를 찾아가서 완벽한 순간을 만들고자 하는 장면을 통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어요. 결국 누군가의 시선에 갇히게 되면서 불안을 겪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시선 밖에서 찾을 기회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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