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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Nov 01. 2023

전쟁 속에서 인간을 찾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읽고

 전쟁 속에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작가 특유의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작품 중에 <개선문>과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었는데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마찬가지로 어둡지만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밝게 그려지고 있어 희망차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전쟁을 겪는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구가 있다고 하면 구의 중심부터 바깥에 이르기까지 층위가 나눠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이 책을 읽으면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 단지 개인적인 특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영향이 있음을 특정 인물들을 중심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가난하고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즉각 전쟁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이라면 전쟁의 결과에 대해 더 명확히 알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카친스키는 이것이 교육 때문이며, 교육이 사람을 맹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카친스키는 말을 하기 전 곰곰이 생각하고서 말하는 사람이다. p.20


 초반에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이야기한 인물은 바로 카친스키였습니다. 카친스키는 주인공과 함께 거의 마지막까지 생존해있었다가 죽게 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가장 마지막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저자가 이 인물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어서일까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습니다. 레마르크의 다른 소설 <개선문>에서는 '외제니'라는 인물을 통해 잘못된 신앙이 가져다주는 파국이 결국 전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외제니'는 어떤 것도 신성시하지 않는 '라비크'를 비판하지만 정작 본인은 신성이 광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죠. 마치 이 소설의 교장선생님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의 실상은 모른채 자국이기주의에 빠져 광기로 변한 모습이 보였거든요.

 이처럼 정작 전쟁으로 인해 이익을 받는 사람들은 전장에 보이지 않습니다. 전장에서는 한 가정의 아빠, 남편, 아들로 살기 원했던 사람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전쟁에 참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느껴져 가슴이 저릿합니다.

우리는 이전 생활과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 나이 든 사람들은 모두 이전의 생활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부인과 자식, 직업과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있다. 이것들은 전쟁으로도 파괴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 하지만 스무 살인 우리에게는 고작 부모밖에 없으며, 개중에는 여자 친구가 있는 사람도 있다. ... 우리의 삶이 아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p.28-29

 스무 살의 주인공과 친구들은 특히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약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 설득되더라고요. 어쩌면 우리나라의 군대도 이런 단절을 초래하고 있는건 아닌가 의문이 듭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D.P'를 보며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요. 사회와 일시적으로라도 단절이 되는 환경에서는 어쩌면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듣고 싶어 한다. 그런 이야기는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아마 모르는 모양이다. ... 전장에서 벌어진 일을 죄다 시시콜콜 이야기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p.177

 뮐러도 휴가를 나와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을 하면서 아픔을 내면화해버리면 시한폭탄을 안고 물 속에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을겁니다.

나는 소름이 끼친다. 여기에서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가는 나락에 빠져들게 된다. 아직은 그럴 시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슴에 간직한 채 묻어 두고 싶다. ... 이것이 공포의 세월을 보상할 만한 앞으로의 삶의 과제가 아닐까? p.205


 전쟁이라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말이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러 책을 읽다보면 글을 쓰는 것이 무언가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 살기 위해 쓴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글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거치는 작가의 모습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와 겹쳐져서 보입니다. 오로지 글쓰기만이 작가들을 살렸다고 생각되거든요.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이다. 삶은 다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삶을 창조해내야 하리라. 거짓 없이. 창조해내기, 맞다. 거짓말하기, 아니다. 창조한다는 건 상상으로 꾸며내기가 아니라 리얼리티의 포착이라는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이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방식이다. p.25

<G.H에 따른 수난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언어는 인간인 나 자신의 노력이다. 내 운명은 찾아나서는 것이고, 내 운명은 그리하여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갖고 돌아온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내 언어의 실패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오직 구조가 무너질 때만이,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얻는다. p.243

<G.H에 따른 수난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어쩌면 사르트르의 <구토>와도 같은 맥락이라고 느껴집니다. 엮어서 카프카까지 말이죠.



그는 수표를 지갑에 넣고, 책 한 무더기를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잠이 안 올 때 읽으려고 이틀 전에 산 것이었다. 책이란 신기한 물건이었고, 그에게는 점점 더 중요한 것이 되어 갔다. 책이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없지만, 다른 것들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이르게 한다. 처음 몇 년간 책에 손도 대지 않았던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비해 책은 그야말고 창백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제 책이 하나의 방벽이 되어 준다. 우리를 보호까지는 못해 주더라도, 적어도 거기에 기댈 수는 있다.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암흑을 향해 질주하는 이런 시대에 책은 최후의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오늘날 경멸당하고 멸시당하는 사상들은 일찍이 인간들이 생각해 내었던 것이며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p.180-181

<개선문2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소망도 미움도 비탄도 없었다. 새로운 시작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다. 강해지기만 할 뿐 결코 부서지지는 않는다는 그런 기대 없이, 인간은 시작하는 것이다. 재는 치워졌고, 마비되었던 곳은 다시 살아났으며, 냉소는 힘으로 바뀌었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p.336-337

<개선문2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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