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봄학교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은 어린이 자신보다 어른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은 구간이다.
<어린이라는 세계> p.252
아이들의 많은 시간은 어른들이 짜놓은 시간에 맞춰 흘러간다. 지금 내가 키우고 있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시간은 아이들과 다를까? 세세하게 다를 수 있지만 크게 보면 비슷하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하는 시간이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획일화되어 있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생긴다. 어른은 스스로 노력을 해서 규정된 시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지만 아이들은 노력만으로는 힘들다. 정말 단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
아이들은 자율성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목소리까지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들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이 반영되지 않은 정책과 제도는 마치 돈으로 돌봄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늘봄학교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서울에 초등학교가 가장 많은데 시행하는 초등학교가 많지 않다. 시행하더라도 신청자를 받고 선별적으로 돌봄을 하고 있어 정책의 수혜를 받는 건지 분류되어 친구들과 거리감만 생기는 건지 알 수 없다.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아이들을 돌볼 인력 부재와 장소가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쉽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할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건 전부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있다.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아닌가. 대체 누가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부모의 스트레스와 아이들의 자율적인 놀이시간이 없어진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사회구조적으로 한국 사회가 시민에게 바라는 모습은 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고 자신의 몸도 스스로 잘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들 중에 하나라도 삐끗했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여러 매체에서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스트레스가 없는 부모가 있을 수 없다. <도둑맞은 집중력>에서도 아이들의 환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게다가 가장 친밀감을 느끼고 안전해야 할 집에서 스트레스가 심하다면 수많은 정책이 뒷받침이 되어도 결국 근본적인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책적으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또한 아이들의 안전문제와 책임문제로 인해 자율적인 놀이시간 제공이 거의 불가능하다.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안 사고가 생기지 않으려면 아이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수밖에 없다. 활동의 제약과 자율적인 놀이시간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돌봄의 공간 제약도 자율성을 제한하는 요소 중 하나다. 큰 공간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인원 제약과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서비스 제공자의 부담도 늘어난다. 큰 공간이 현실적으로 마련하기 힘들고 많은 인원을 돌볼 수 있는 전문 서비스 제공에 대한 인식도 부재한 상황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뛰어놀고 싶다. 그리고 자유롭고 싶다.
결정적인 요인은 "환경이 얼마나 혼란한가"였다.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집중력 문제를 겪고 ADHD를 진단받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대체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부모들이 받는 큰 스트레스"인 것으로 드러났다. 앨런이 말했다. "문제가 퍼져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둑맞은 집중력> p.353
놀이와 음악, 휴식을 비롯한 시험 이외의 거의 모든 것이 꾸준히 밀려나고 있다. 학교 대부분이 진보적이었던 황금시대 같은 것은 존재한 적이 없지만, 학교 제도가 효율성이라는 편협한 비전을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도둑맞은 집중력> p.370
공교육 정상화에 대한 목소리가 이미 많이들 린지 오래됐다. 작년에는 공교육이 무너진 결과가 사회에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보다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버리고 방치하고 있다.
아이들이 줄어드는 것이 먼저인지, 공교육이 망가져 버린 것이 먼저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악화일로에 접어들고 있다. 진정 아이들을 학교에서 저녁 8시까지 맡겨두고 노동력을 사회에 제공하도록 만드는 전략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건가. 왜 이런 질문은 하지 않을까.
초등학교도 문제가 많지만 이후 중고등학교까지 문제가 확산될 조짐이 보인다. 고교학점제 도입과 새로운 교육과정이 시작되면 입시가 가지는 변별성이 상실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대학교에서는 학생을 뽑기 위해 자체 기준이 적용된 시험을 준비하려고 할 것이다. 학교 공부보다는 사교육 시장에서 대학교 시험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개인에게 있다. 개인에게 중요한 것을 희생시켜 가면서 사회에 헌신하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누가 동의하겠나. 흔히 워킹맘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가 생기면 회사에서 짜증 나고 화나는 일이 이제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아이가 가장 우선순위가 높아지기 때문에 2순위로 밀려나는 회사일은 상대적으로 중요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녁 8시까지 회사에서 일하라는 이야기를 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정책이란 말인가. 그리고 학교에서는 누가 저녁 8시까지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어른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유지를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아이들은 없다. 그저 원치 않는 노동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부림만 있다.
아이를 돌보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쌓이고 아이라는 낯선 존재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 양육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지고 돌봄의 분배는 조금 더 정의로워질 것이다. <돌봄과 작업> p.112
고통을 이해하는 문화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것과 같다. 돌봄에 가장 방해가 되는 건 바로 바쁜 삶이다. <돌봄과 작업> p.251
우리 사회에는 돌봄이 제도적으로 부족하기도 하지만, 나는 돌봄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돌봄이 제도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된다고 하더라도, 어찌 되었건 구체적인 돌봄의 수행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 돌봄 노동의 복잡한 특성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돌봄의 가치를 재평가하지 않는다면, 이 일은 또다시 불안정 노동과 저임금 노동이 되어 여성의 몫이 되고, 그 구조 안에서 여성 노동자는 또다시 스트레스를 홀로 감당하며 고립될 것이다. <돌봄과 작업> pp.291-292
지금까지 노동의 젠더 불평등에 대한 법적 대응은 주로 '여성의 남성화' 방식에 치중하여 이루어져 왔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제1조에서 법의 목적으로 "... 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고 모성 보호와 여성 고용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며 노동시장 영역에서 여성의 취업률을 높이는 방식을 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고용률이 높아지면, 돌봄을 남녀가 공평하게 분배하기보다는 비용을 지불하고 필요한 서비스를 구매하는 돌봄의 '상품화'현상이 심화된다. 임금노동과 돌봄 노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재생산을 매개로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돌봄 노동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은 채 노동시장의 고용 불평등만을 시정하려 하는 것은 젠더 불평등 문제의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 <영혼 있는 노동> pp.69-70
기존의 노동법은 임금노동권만을 주로 보장하고 있으나 변화된 시대의 노동법은 돌봄 노동권을 동시에 보장하는 방식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가사, 양육, 간병 등 돌봄 노동은 힘들고 번거로운 의무인 것처럼 인식되지만, 한편으로 자기 자신과 친밀한 사람들을 돌볼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삶의 본질적인 기쁨이자 누구나 생애 주기 속에서 원하는 때에 누릴 수 있어야 할 권리이기도 하다. 일터에서의 임금노동을 벗어나 가정에서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활동을 하는 것이 하나의 권리로 인식될 필요가 있으며, 노동법이 보다 정의롭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점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영혼 있는 노동>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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