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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당한 목소리를 전시하다

<순수 박물관>을 읽고

by 태양이야기

박물관은 약탈의 상징이었다. 자기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소유욕이 박물관이라는 괴이한 형태의 건축물을 만들었고 지금에 이르게 됐다. 역사를 공부하고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대체 무엇을 공부하고 기억해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답을 주지 못한다. 역사는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의 전유물이며 박물관의 유물에는 과거의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편집한 편협한 시각이 존재할 뿐이다.


순수 또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마치 있다고 믿고 싶은 것에 '순수'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숭배하고 받들면서 자신을 신화 이야기 속에 비집고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마치 여신을 차지한 남성으로 말이다.


순수 박물관은 바로 케난의 편협한 시각으로 점철된 희생자 퓌순의 무덤이다. 철저하게 케난의 시각으로만 퓌순을 바라봤지 절대 퓌순의 속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이야기했어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리스로마신화 또한 남성 위주로 쓰였다고 한다면 <천 척의 배>와 같이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퓌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흥미진진하겠다.


오르한 파묵의 글은 맨 처음 <내 마음의 낯섦>으로 접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약 40여 년 간 이어지게 되는 현대화 과정 속에서 전통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질문하고 있던 책이었다. 글은 흡인력 있었고 단숨에 읽은 후 여운이 남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나니 오르한 파묵은 전통이라는 소재를 항상 등장시킨다는 걸 알게 됐다. 비록 이 책은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미술 기법인 세밀화와 새로운 화풍의 대결이 이어진다. <순수 박물관>에서는 구체적으로 전통에 대해 '순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박물관'이라는 장소를 통해 전통을 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느껴졌다.


주인공은 무언가에 집착하는 나르시시스트였다. 수많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근거는 바로 착각이다. 시벨에 대한 착각, 퓌순에 대한 착각 등 자기중심적인 수준을 넘어선다. 게다가 내로남불은 역대급이다. 튀르키예의 '순수'가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관습으로 인해 겪게 되는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p.103) 정작 퓌순과 시벨에게는 적용하지 않다니 얼마나 괴기한가. 또 다른 근거는 바로 물건과 그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특히 담배꽁초 4213개에서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p.585). 이후 여러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전시되어 있는 것 자체가 순수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깨달았다는 고백(p.735)은 결국 퓌순을 사랑했다기보다 '순수'라고 느껴지는 물건을 수집하는 걸 사랑했다고 느끼기에 충분하다.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하지만 결국 튀르키예 전통을 사랑하고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저자의 마음 또한 포착해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 시간은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라고 말하며 아무도 완전히 잊을 수 없다(p.430)고 말한다. 그렇지만 마지막 퓌순을 만났을 때 귀걸이를 못 알아봤다. 퓌순을 사랑했다기보다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다. 자신이 만든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잊을 거라고 한다(p.761).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 자신을 만나기 때문일까. 박물관에서 느꼈으면 하는 건 서양에 대한 동경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관람(p.767)하라고 하니 맞는 것 같다. 자신을 서양인인 양 느끼게 해 주는 환상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여 줘야 한다니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맞다. 그렇지만 당시 튀르키예나 지금을 돌아봤을 때 '서구적인'삶을 동경하며 케난은 단순하고 근본적인 면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고백한다(p.323). 하지만 퓌순을 만나러 가는 뒷골목에서 내 삶의 잃어버린 중심부를 찾은 것 같다고 말하니 전통을 향한 고백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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