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답장
유정님에게
“자꾸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란 제목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구나, 나는 타인에게 이런 모습으로 보이길 원하는구나 무릎을 탁 치게 되었죠.
제게 유정님은 “시작을 선물하는 사람”이에요. 유정님의 크고 작은 시작들을 어깨너머로 구경했고, 저의 시작을 등 떠밀고 이끌어 주기도 했죠. 저는 뭘 해도 시작이 가장 어려워요. 가볍게 지나가듯 시작하기가 영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런 제게 처음에는 감당하기 버거운 에너지였어요. 여러 번 거절도 했죠? 하지만 지난 1년을 돌아봤을 때, 유정님 덕분에 시작한 일들의 목록이 꽤 길어요. 숟가락으로 떠 먹여준 것도 있고, 등을 확 떠민 것도 있고, 은근히 부추긴 것도 있고…… 그 작은 시작들이 지금은 제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 편지도 방금 목록에 추가되었네요.
저는 가족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누가 제게 잔소리를 하면 도망을 가는 편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이 원칙은 평생 동안 신성히 지켜왔어요. 그런데 왜 유정님의 공격에는 지고 말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말 때문인 것 같네요. “전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빛을 발할 수 있게끔 돕고 싶어요.” 더 멋진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저질 기억력의 한계가…… 어쨌든 이 말을 들었을 때 마음에 와닿았어요. 이상하게 저 말만큼은 냉소와 비판의 시선이 작동하질 않았어요. 도무지 위선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허세라면 실천이 동반된 허세니까 비전이라고 봐야죠. 그 마음이 저를 움직이고 시작하게 했던 거예요. 참 다양한 시작을 제안해 주셨고, 제가 내켜하지 않으면 전혀 다른 아이디어를 짠 하고 보여주셨죠. 내가 뭐라고 저렇게 열심이실까, 미안함과 도망가고픈 마음이 자주 들었지만 결국 태(유정에게 스)며들고 말았네요. 그 고마움은 아무리 표현해도 모자라고요. 그런데 고맙다고 말해도 모자랄망정 배은망덕하게도(?) 저는 유정님의 그 열정에 대해 궁금한 점이 한 가지 남아있기에, 이 기회를 빌어 여쭈어 봅니다.
저의 잔소리는 가족을 향하지만 철저히 나를 위한 것이거든요. 나의 안심, 나의 만족, 나의 성취감을 위해 잔소리를 해요. 저는 제가 되게 착하고 헌신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진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과 뼈아픈 경험이 필요했어요. 결국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이타심이 아닌 자기만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잔소리에 별 흥미가 없어지더라고요. 그렇다고 유정님이 이 사실을 모르실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함께해 온 무수한 독서모임들만 떠올려 봐도 이 주제에 관해 우리는 혹독하게 스스로를 검열하고 반성하는 작업을 해 왔죠. 저의 경우 자신에 대해 알게 될수록 내면세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소란스러운 외부와의 연결들을 하나하나 끊어내며 더 충실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고요. 반면 같은 작업을 했는데 유정님의 에너지는 더욱 외부로 발산되는 것 같아요. 마치 마음속에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 원천을 지닌 사람처럼, 유정님을 알게 된 후 2년 동안 한결같은 열정으로 타인을 대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죠.
전에 말씀하셨듯 우리가 함께하는 독서모임이 흥미로운 이유는 우리가 이 지점에서 자주 다른 답을 내놓는다는 거예요. 저는 개인과 내면을, 유정님은 사회와 집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죠. 두 가지 모두 필요해요. 행복한 개인이 없는 집단은 무의미하고, 소속감이 없는 개인은 위태로우니까요. (덧붙이자면 저는 평화로운 태유정 월드에서 개인주의자로 살고 싶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약간 있는 것은 괜찮겠죠?) 서론이 길었는데 이제 질문드릴게요. 유정님이 세상과 열렬한 관계를 맺게 하는 열정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유정님은 타인을 돕고 싶은 건가요? 마침 며칠 전 우리가 함께 <그랜드 스탠딩>을 읽고 토론을 했으므로, 이 질문에 대한 솔직한 답을 듣기에 적절한(혹은 잔인한) 타이밍 같아요.
아참, 그리고 저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베란다 텃밭이에요. 처음 몇 달은 물을 많이 주면 과습으로 죽고, 띄엄띄엄 주면 말라서 죽어서 텃밭이 아닌 식물들의 무덤이 될 뻔했는데 가까스로 몇 가지 허브는 잘 자라나고 있어요. 핵심은 “내가 물 주고 싶을 때” 주는 것이 아니라 “겉흙이 말랐을 때” 물을 주는 것이더라고요. 외부와 차단하고 중심을 “나”로 가져오는 연습과, 반대로 “나”를 잊고 외부를 관찰하는 연습. 이 두 가지 중 후자를 텃밭에서 배우고 있어요.
“희망”에 관해 인용해 주신 글귀에 동의하는 편이에요. 점점 무성 해지는 텃밭을 볼 때 저는 그런 희망을 느끼거든요. (생각해보니 희망보다는 “예감”이라는 표현이 더 좋은 것 같아요. 희망은 가냘픈 가능성이지만, 예감은 믿음의 뉘앙스가 있지 않나요. 미래를 바라보는 많은 방식이 있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태도는 “희망을 갖는다” 보다는 좀 더 “예감한다” 쪽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예감은 내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며 비롯되는 믿음이에요.) 어쨌든 지금 제가 희망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한 달이 지나면 직접 키운 방울토마토를 수확할 수 있다. 토마토는 단단하고 빨갛고 새콤할 것이다. 곁에 자라고 있는 바질과 함께 맛있는 카프레제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난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크하하”
박민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