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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유주 Oct 26. 2021

'아, 가을이 왔다!'

조선일보_일사일언 연재_손유주

밤잠까지 설치게 했던 여름 더위가 한 풀 꺾였다. 뜨거운 태양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짧고 강렬했던 여름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어쩐지 조금 아쉽다. 해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면, 좀 더 시간을 내 독서와 글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천한 기억은 손으로 헤아리기도 힘들다.

대학원 재학 시절 희곡 창작 시간이 떠오른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극작가 윤영선 교수님의 수업이었는데 글쓰기에 여간 자신이 없던 나는 개강 전부터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첫 수업의 과제는 ‘내 방 묘사하기’였다. 모니터 앞에 앉아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려 봤지만 문장은 세 줄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몇 자도 쓰지 못한 채 하루가 기울고 ‘내 방’에는 노을이 만든 긴 그림자만 남았다. 어쩔 수 없이 온종일 방에서 하루를 보낸 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 내 방의 풍경을 묘사해 과제랍시고 제출했다.

다음 희곡 창작 시간.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교수님이 내 이름을 호명하셨다. “손유주가 누구지?” 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내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자 “이번 과제에서 1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로는 “테크닉은 없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한 글”이라고 평가해주신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그 뒤로 단 한번도 글쓰기에서 1등을 하거나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모호한 문장으로 멋을 부려 제출한 이후의 과제들은 지금 열어 봐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희곡 창작 시간을 돌아보면 글쓰기에는 재주가 필요 없다. 종이와 연필, 최소한의 도구만 있으면 된다. 내 마음을 꾸밈없이 쓸 수 있는 솔직함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재능이 된다.

며칠 전 갑자기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휴대폰을 열었다. 그날 적어 놓은 문장을 여기에 옮겨본다. ‘뜨거운 볕에 꼼짝도 않던 나뭇잎이 하나 둘 움직인다. 아, 가을이 왔다!’


#가을 #계절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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