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음 날 이른 아침, 시끄러운 경적 소리에 잠이 깼다. 미용실 밖으로 나가보니 엄마는 이미 잠옷 바람으로 거리에 서 있었다. 수많은 버스와 택시들이 돌고개를 지나 양동시장 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월산상회 아저씨는 결연한 표정으로 셔터를 내린 뒤 그 행렬을 뒤따랐고, 어제 함께 짜장면을 먹었던 동네 어른들도 뒤섞여 사라졌다.
엄마는 미용실로 들어와 냉수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도 따라 옷을 챙겨 입으려 하자, 엄마는 내가 태어나 처음 보는 엄한 얼굴로 내 어깨를 눌렀다.
“영준아, 엄마 말 잘 들어. 운용이 삼촌 찾으러 갔다 올 테니까, 너는 여기서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딱 기다려. 배고프면 저기 보름달 빵이랑 우유 먹고 있어. 금방 올게, 걱정하지 마.”
내가 떼를 쓰며 매달리자 엄마는 내 손을 꽉 잡고 옆집 커튼집으로 향했다.
“은숙이 엄마, 부탁 좀 할게. 나 도청 좀 갔다 올 테니 우리 영준이 좀 봐줘.”
“언니, 거길 가려고?”
“운용이 찾으러 가야 해.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아.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 아니겠어?” “아이고 언니, 가지 말랑게. 은숙이 아빠도 새벽같이 나가버렸어. 우짜 쓰까잉?”
“암튼 부탁해… 영준아, 은숙이랑 사이좋게 놀고 있어, 알았지?”
엄마는 부리나케 양동시장 쪽으로 뛰어갔다. 멀어져 가는 엄마의 뒷모습에 대고 은숙이 엄마는 “오매, 뭔 일이다냐”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거리는 어수선했다. 은숙이 엄마는 우리를 살피면서도 자꾸 도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충장로로 향하는 차량 위에서 사람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구호를 외쳤고, 은숙이 엄마는 그들을 향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트럭 한 대가 멈춰 서서 “물 좀 있소?”라고 묻자, 은숙이 엄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미용실로 달려가 가장 큰 주전자에 물을 가득 받아 건넸다. 다른 가게 이모들도 나름의 그릇에 물을 담아 날랐다. 물을 나눠 마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감 대신 묘한 여유와 미소가 감돌았다.
어른들이 물 배달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유미반점 아들 성철이 형이 몇몇 형들을 데리고 커튼집으로 들이닥쳤다. 형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덕림산 기지로 놀러 가자는 신호였다.
“엄마가 암 데도 가지 말라고 했는디…….”
말끝을 흐리면서도 나는 이미 신발을 똑바로 고쳐 신고 있었다. 엄마의 당부보다는 성철이 형의 휘파람 소리가 훨씬 무거웠고, 한동안 오르지 못했던 덕림산의 오월, 그 눈부신 초록색이 일곱 살의 나에겐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은숙이는?”
“안 돼. 남자끼리 가야 해. 어른들 몰래 지금 빨리 가야 한다고.”
아쉬워하는 은숙이를 뒤로한 채 우리는 어른들의 시선을 피해 덕림산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다행히 뒤를 돌아보아도 우리를 찾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해발 79미터의 덕림산은 산이라기보다 완만한 구릉에 가까웠다. 꼭대기에 오르면 무등산이 수채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언덕 잔디에 누워 풍경을 즐기다 목이 마르면 ‘덕림사’라는 작은 절로 향했다. 스님을 본 적은 없었지만, 우리는 이미 허락이라도 받은 양 약수터 물을 마시고 손발을 씻었다. 다만 절 왼쪽으로 난 길만은 금기였다. 그곳엔 ‘거지촌’이라 불리는 넝마주이들의 움막이 있었는데, 성철이 형 말로는 그곳 아저씨들이 닭 잡는 칼로 위협하며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했다. 멀리서 바라본 움막 앞에는 닭과 병아리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병아리들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용기가 나에게도, 형들에게도 없었다.
우리는 오른쪽 우거진 숲 안쪽, 우리만의 비밀 기지로 스며들었다. 개울이 흐르고 개구리가 지천인 그곳에서 형들은 집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구웠다. 잔가지를 모아 만든 화덕에 구운 고구마와 개구리 다리는 세상 그 무엇보다 맛있었다.
어느덧 노을이 능선에 걸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움을 달래려 마지막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산속 숨바꼭질은 차원이 달랐다. 나는 자타공인 ‘신동’ 답게 형들이 가지 않는 깊은 수풀 속 미리 파둔 나만의 은신처로 몸을 숨겼다. "못 찾겠다 꾀꼬리!" 소리가 들릴 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 형들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이 일곱 살 인생의 가장 큰 통쾌함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한창 웃고 떠들던 형 하나가 벼락 맞은 듯 멈춰 서더니 비명을 질렀다.
"군인들이다! 군인들이 온다!"
산 전체가 얼어붙었다. 형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 아래로 내달렸다. 나도 필사적으로 발을 굴렀지만, 지면 위로 툭 튀어나온 굵은 나무뿌리가 내 발목을 낚아챘다.
“아악!”
비명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발목에서 전기가 치듯 강한 통증이 올라왔다. 형들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일어서려 했지만 발목이 시큰거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제대로 접질린 것이었다.
군화 발소리가 등 뒤까지 바짝 다가왔다. 나는 절뚝거리며 근처 덤불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가시 돋친 가지들이 뺨과 팔을 할퀴었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하지만 군화 소리는 내 머리맡에서 멎었다. 둔탁한 쇠뭉치가 바닥에 내려놓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총이었다.
"여기가 좋겠군."
서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야, 저 두 놈 이리 끌고 와."
질질 끌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이 들렸다. 나는 덤불 틈새로 눈을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