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발소리가 멈춘 곳은 불과 몇 발자국 앞 공터였다. 그곳엔 두 명의 남자가 무릎이 꺾인 채 처박혀 있었다. 한 명은 눈을 감았고, 다른 한 명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검붉게 굳어 있었다. 가장 높아 보이는 군인이 수통을 꺼내 마시고는 ‘크으’ 소리를 냈다. 수통은 아홉 명 남짓한 군인들에게 골고루 돌아갔다.
“막내!”
“넵, 하사 이용배!”
앳된 얼굴의 하사가 부리나케 뛰어갔다. 중사 계급장을 단 사내가 총구 끝으로 하사의 헬멧을 툭 치며 말했다.
“저 새끼들, 아직 숨이 붙어 있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네? 잘… 모르겠습니다.”
“뭘 몰라, 새끼야. 묻어야지. 여기 땅 잘 파지겠네. 빨리 파.”
하사가 주춤거리며 야삽을 꺼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삽날이 거친 흙바닥을 파고드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미용실의 소리들을 떠올렸다. 엄마의 경쾌한 수건 터는 소리, 가위의 ‘삭삭’ 소리. 하지만 지금 내 귓가를 때리는 건 뼈를 부수는 듯한 타격음과 짐승 같은 군인들의 욕설뿐이었다.
중사가 무릎 꿇은 두 사람의 머리와 복부를 걷어찼다. 신음도 내지 못한 채 꼬꾸라진 그들의 머리에서 다시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그때 한 군인이 다가와 보고했다.
“중사님, 중대장 무전입니다. 위치 확인하라고 합니다.”
“아이 씨발, 귀찮게 하네. 월산동 덕림산 주택가 인근, 폭도 의심자 추적 중이라고 보고해. 곧 복귀한다고.”
중사는 다른 군인의 수통을 뺏어 벌컥벌컥 마시더니 길게 ‘크으’ 소리를 내뱉었다.
“안주가 필요 없네.”
그 말에 속이 뒤틀리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비릿한 피 냄새가 스며들었다. 구덩이가 깊어지자 중사가 담배를 피워 물며 명령했다.
“덮어라. 빨리 가자.”
막내 하사가 다시 주춤하자, 중사가 다가가 그의 뺨을 갈겼다. 공터를 휘감는 타격음에 몸이 떨렸다.
“정신 차려.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야. 빨리 묻어!”
사지가 맥없이 풀린 두 사람이 쓰레기 포대처럼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다. 하사는 고개를 떨군 채 무심하게 흙을 쏟아부었다. 한 삽, 또 한 삽.
그때였다. 붉은 흙더미를 뚫고 손 하나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솟구쳐 올랐다. 손톱 밑에는 검은흙이 박혀 있었고, 굳은살 박인 손가락 끝은 마지막 공기를 잡으려는 듯 파들 거리고 있었다.
“억…!”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신음이 정적을 흔들었다. 삽질 소리가 멎었다. 덤불 근처 군인이 내가 있는 쪽을 응시했다. 군화가 나뭇가지를 밟는 ‘바스락’ 소리가 내 심장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도망치려 몸을 일으키는 순간, 거친 손이 내 뒷덜미를 낚아챘다. 나는 귀 잡힌 토끼처럼 공중에서 버둥거렸다.
나는 구덩이 앞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차가운 총구가 내 이마를 겨냥했다. 헬멧 아래 핏발 선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군인의 눈에 맺힌 지독한 슬픔을 보았다.
“뭐야, 숨어서 보고 있었던 거야? 허허.”
중사가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끄며 툭 던졌다.
“우리 얼굴 봤으면 어쩔 수 없지…… 같이 넣어.”
옆에 있던 하사가 또다시 “네?” 하고 되묻자, 중사의 발이 하사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하사는 구덩이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로 옆에는 죽은 자의 손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하사는 삽을 쥐고 다시 기어 올라왔다. 중사가 하사의 얼굴을 꼬집듯 잡고 비웃었다.
“늙은 놈이나 젊은 놈이나... 어린놈이나 다 빨갱이야. 알았어?”
하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고, 터진 입가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그는 아무 대답 없이 다시 총을 들고 나를 겨누었다. 하지만 떨리는 그의 총구는 내 이마가 아닌, 미세하게 옆에 서 있는 상관들의 머리 뒤를 쫓고 있었다. 일곱 살인 나조차 그가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 숨어있던 마지막 태양이 얼굴을 빼꼼히 열어 우리를 바라볼 때,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노을을 갈랐다.
“아이 개새끼들아!”
넝마주이 이 씨 아저씨였다. 이 씨 아저씨는 쏜살같이 뛰어와 빈 병을 고르던 낡은 몽둥이로 중사의 뒤통수를 주저 없이 가격했다. 뒤를 따른 넝마주이들의 대형 집게도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군인들을 쓰러뜨렸다. 넝마주이들은 쓰러진 군인들에게서 곧바로 달려들어 총, 탄창, 곤봉을 빼앗아 챙겼다.
이 씨 아저씨는 쓰러진 군인들을 훑어본 뒤, 곧장 흙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저씨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맨손으로 흙을 파헤쳤다. 머지않아 흙더미 속에서 두 남자의 형체가 드러났다. 아저씨는 그들을 껴안고 미친 듯이 흔들어 깨웠지만, 돌아오는 것은 죽음보다 깊은 정적뿐이었다. “크아….” 아저씨는 가슴을 쥐어짜듯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초점 잃은 눈으로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저씨가 나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영준아!”
아저씨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내게 달려왔다. 내 몰골과 구덩이 속의 시신을 번갈아 보던 아저씨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아저씨는 동료 넝마주이들에게 이 둘을 빨리 병원으로 옮기라고 소리친 뒤, 나를 덥석 둘러메었다.
“영준아, 가자!”
아저씨는 쓰러져 있는 군인들을 향해 침을 뱉으며 알 수 없는 욕설을 퍼붓고는 곧바로 산 아래로 내달렸다. 업혀 흔들릴 때마다 접질린 발목이 끊어질 듯 아파 왔지만, 차마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하사가 다른 넝마주이의 몽둥이를 별 저항 없이 맞으며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의 품에선 퀴퀴한 미용실 수건 냄새가 났다. 익숙한 온기가 코끝에 닿자 하마터면 고였던 눈물이 터져 나올 뻔했다.
돌고개 사거리 신호등 앞에 도착해서야 아저씨는 나를 내려놓았다. 아저씨는 ‘씩’ 하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윙크를 보냈다.
“얼른 미용실로 들어가. 가서 엄마랑 꼭 붙어 있어. 나오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선 이 씨 아저씨는 다시 어둠이 깔리는 덕림산 쪽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절뚝거리는 발을 끌고, 차가운 셔터가 반쯤 열린 미용실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영준아! 아이고 우리 아들!!"
어둠 속에서 엄마가 비명처럼 나를 부르며 달려와 안았다.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는 순간, 그제야 억눌러왔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의 어깨너머로 삼촌의 모습이 보였다. 며칠 새 얼굴은 까칠하게 마르고 옷은 흙먼지로 엉망이 되었지만, 삼촌은 왼쪽 팔에 하얀 완장을 찬 채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넝마주이 아저씨의 등보다, 엄마의 품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