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의 시간

7화

by 황 영




꿈을 꾸었다. 수많은 병아리가 덕림산 언덕을 평화롭게 거닐고 있었다. 모이를 던져주며 그 부드러운 노란빛을 바라보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붉은 눈을 한 군인들이 다가왔다. 도망쳐야 했지만 다친 다리는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군인들의 군화가 병아리들을 짓밟으려는 순간,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떨었다. 그때, 삼촌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영준아, 괜찮아. 무서운 꿈 꾼 거여?”


잠결에 본 삼촌의 얼굴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삼촌은 엄마 몰래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어디 가냐고 묻기도 전에 삼촌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쉬" 하고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꼭 쥐여주었다. 삼촌의 땀 냄새와 새벽의 눅눅한 공기가 밴 지폐였다. 삼촌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문을 나서려던 그때,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삼촌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운용아. 머리... 머리 자르고 가.”


잠들지 못했던 엄마였다. 삼촌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짧게 "응"이라고 대답하며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엄마는 주전자째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잠옷 바람으로 삼촌에게 가운을 씌워주었다.


이내 가위질 소리가 시작되었다. 평소엔 경쾌하게 공중을 가르던 가위 소리가 오늘따라 진흙을 자르듯 둔탁하고 무거웠다. 엄마는 한 올의 머리카락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힘주어 가위를 놀렸다. 머리를 다 자른 뒤에는 허리를 숙인 삼촌의 머리를 정성껏 감겨주었다. 그 모습이 꼭 커다란 아기 같아서 나는 살짝 웃음이 났다.


엄마는 '진미용실'이라고 파란 글씨가 새겨진 빳빳한 새 수건으로 삼촌의 머리를 힘차게 털어주었다. 위잉거리는 드라이기 소리가 멈추자 미용실 안은 물속처럼 고요해졌다. 엄마는 평소 삼촌이 부담스러워하던 고데기까지 꺼내 단정한 교수님처럼 삼촌의 머리를 매만졌다. 삼촌은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거울 속의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잘... 갔다 와... 빨리 와.”

“...... 응 누나. 잘 갔다 올게.”


삼촌의 뒷모습이 사거리 안갯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엄마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뚫어지게 안개 너머를 보았다. 엄마의 손끝에서는 다시 알싸한 아세톤 냄새가 났고, 나는 삼촌이 주고 간 만 원짜리를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삼촌이 남긴 샴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미용실 안으로, 차가운 오월의 아침이 도둑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삼촌이 떠난 뒤 미용실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엄마는 손님 없는 의자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찍어냈고, 바닥엔 치우지 못한 삼촌의 머리카락들이 미련처럼 흩어져 있었다. 한참의 정적을 깨뜨린 건 사거리로 밀려 들어온 거대한 함성이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가 이겼습니다!”


셔터를 반쯤 올리고 나가자 대형 트럭 위로 총을 든 시민군들이 보였다. 비장함과 생기가 서린 그들은 애국가를 차가 멈춘 뒤에도 한 동안 팔을 휘저어가며 힘차게 부르더니 애국가가 끝나자 그들은 트럭에서 내려 상가를 돌며 화장실을 찾거나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순식간에 돌고개 사거리는 거대한 휴게실로 변한 듯했다. 커튼집 이모는 양은솥을 들고 나와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했고, 유미반점 아저씨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갓 튀겨낸 군만두를 신문지에 싸서 시민군에게 주거나 트럭 위로 던져 올렸다.


“미안하요! 내가 월남전에서 다리를 다쳐부러 갔꼬, 다리가 이 모양이라... 같이 못 가서 정말 미안하요!”


만두의 기름진 냄새가 사거리에 진동했다. 엄마도 미용실 안의 새 수건을 몽땅 들고 나와 보이는 사람마다 한 장씩 건네고 있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넝마주이 이 씨 아저씨가 보였다. 엄마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


“아저씨, 어제 우리 영준이 데려다줘서 정말 고맙소.”


아저씨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악수에 당황해했다. 이 씨 아저씨는 지켜보고 있던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다리에 맨 붕대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러더니 입모양으로 '괜찮냐?'고 물어본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위아래도 끄덕여 대답했다.


“맨날 머리카락 챙겨준 보답인개, 신경 쓰지 마셔요.”


떠나려는 아저씨의 머리는 흙먼지와 땀범벅이었다.


“아저씨, 머리가 그게 뭐여. 이리 오쇼. 머리 좀 감고 세수라도 하고 가야제!”


엄마는 넝마주이 아저씨와 시민군 아저씨들 몇 명을 미용실 안으로 이끌었다. 셔터를 완전히 올리고 샤워기를 높이 든 엄마가 머리와 얼굴을 엄마에게 들이미는 사람 모두에게 아낌없이 물과 샴푸를 뿌려주었다. 하얀 거품이 아저씨들의 검은 때를 씻어내며 바닥으로 흘러갔다. 미용실 안은 땀 냄새 대신 향긋한 비누 향으로 채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고개 전체를 가득 채운 듯했다. 엄마는 ‘진미용실’ 수건들을 아낌없이 꺼내 건넸다.


“머리에 한 장, 얼굴에 한 장!”


아저씨들은 젖은 머리를 털고는 하얀 수건을 훈장처럼 목에 하나씩 두르고 밖으로 나갔다. 이내 사거리의 시민군들은 다시 떠날 준비로 분주했다. 그때, 월산상회 아저씨가 가게에서 나오더니 곧장 엄마 앞으로 다가섰다. 아저씨의 눈빛은 무겁고도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