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는 나의 뮤즈였다
90년대 후반, 대학 캠퍼스. 나는 과 학생회장이었고 너는 볼살이 채 빠지지 않은 신입생이었다. 많은 신입생이 학생회를 피하던 때, 너는 스스로 낡은 학생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난 듯, 너는 열성적이었다. 과 회의부터 체육대회, 영어 연극제까지. 무슨 일을 맡겨도 힘들다는 기색 없이 묵묵히 해냈다. 책임감과 성실함이 네 몸에 기본값처럼 박혀 있었다. 선배들 사이에서 네 이름이 기특함과 함께 자주 오르내렸고, 그럴 때마다 내 입꼬리는 저절로 올라갔다. 마주칠 때면 너는 허리를 깊게 숙여 '안녕하십니까'를 또렷이 내뱉었다. 예의 바르고 조금은 귀여운 목소리로.
노란 가로등이 가을밤을 데우던 무렵, 우리 과의 가장 큰 행사인 영어 연극제 준비가 시작됐다. 영문과답게 모든 대사는 영어였고, 총장님까지 참석하는, 한 해를 상징하는 무대였다. 졸업을 앞둔 내게 또다시 총감독 역할이 주어졌다. 몇 번을 고사했지만, 결국 수락 조건으로 이번에야말로 벼르던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생들 대다수는 주제가 너무 무겁다며 반대했다. 특히 배우들은 프로들이나 하는 거라며 학을 뗐다. 모두가 내 고집을 꺾으려 애쓸 때, 너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내 심장으로 곧장 파고들어, 나의 오랜 신념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모두에게 말했다.
"햄릿은 주제가 좀 무겁긴 해. 그치?"
내 말에 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니, 방금 '햄릿'에 대한 고집을 꺾은 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결국 연극은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정해졌다. 비록 원하던 비극은 아니었지만, 너의 미소를 얻었다는 점에서 나는 만족했다.
연극 준비와 중간고사가 겹친 시기였다. 낮에는 대본 연습과 무대 제작으로 소란했고, 밤에는 도서관의 침묵 속으로 각자의 불안을 안고 흩어졌다. 그날도 나는 전공 서적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카페인 덕분인지, 아니면 책임감 때문인지 잠은 오지 않았지만, 문장들은 눈앞에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몇 칸 떨어진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네가 보였다. 너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려 애쓰며, 두꺼운 셰익스피어 원서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연극 스태프 일만으로도 벅찰 텐데, 학업까지 놓지 않으려는 그 고집스러운 성실함이 새삼스레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자판기로 향했다. 따뜻한 캔커피 두 개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망설임은 짧았다. 네 자리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놀란 네가 고개를 들었다. 피곤함에 살짝 풀어진 눈이었지만, 나를 보자 금세 맑게 빛났다.
“이거 다 마실 때까지만 쉬었다가 해.”
우리는 도서관 휴게실 창가에 나란히 섰다. 연극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왜 위대한지에 대해, 인생의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너는 내가 무심코 던진 문장을 허투루 듣지 않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너의 언어로 되돌려주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와 이야기하는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소란스러운 학생회실이 아닌, 텅 빈 휴게실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너의 다른 얼굴을 보았다. 그날 밤, 나는 너를 단순히 ‘기특한 후배’가 아니라, 나와 같은 종류의 고독을 아는 한 명의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연극제 준비로 술과 잠을 줄이자 체중도 덩달아 줄었다. 예민해진 만큼 자잘한 실수가 잦아졌다. 깜박 두고 온 노트북을 찾으러 다시 학교로 향하던 밤이었다. 학생회실로 가는 길, 불 꺼진 복도 끝 빈 강의실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이끌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있었다. 무대 배경으로 쓸 그림을, 혼자 쭈그려 앉아 그리고 있었다. 너는 내가 보고 있음을 모른 채 붓질을 계속했고, 나는 창문 바깥에서 까치발로 한동안 가만히 서서 널 보았다. 입술을 야무지게 오므리고 앞으로 내민 채, 숨마저 참아가며 색을 입히던 너의 모습. 내일까지 배경을 완성하라고 독촉하던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래도 이렇게 늦게까지 혼자 남을 일은 아니었다. 너의 붓끝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혼자만의 세계가 그려지는 듯했고, 그 깊은 몰입의 순간, 나는 보이지 않아야 할 너의 외로움을 보았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문득 고개를 든 네가 창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놀란 듯 작은 손에서 놓친 붓이 바닥을 가볍게 쳤고, 너는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 오랜만에 마주한 연인을 보듯 신비롭게 번지는 미소, 그리고 이내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살짝 떨구는 모습까지. 그 밤, 둘만이 남은 듯 고요하던 강의실의 온도와 너를 닮아 달아오르던 내 얼굴의 열기가 아직도 또렷하다.
리허설이 무르익을수록 무대 뒤는 바빠졌다. 너는 양손에 다른 일을 쥔 사람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오른손으로는 소품 목록을 훑고, 왼손으로는 분장실 문을 두드려 배우들을 불렀다. 내가 고개만 조금 돌려도, 너는 그 방향을 귀신같이 따라왔다.
"거기 줄리엣 단검 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는 상자에서 칼을 꺼내 들며 물었다.
"이거 맞죠?"
나는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내 마음속의 '다음'은 언제나 네 손에서 먼저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준비성이 아닌, 직감에 가까운 예감의 능력처럼 느껴졌다.
무대 왼편 윙에서 내가 큐시트를 펼쳐 숨을 고를 때면, 너는 반대편에서 내 어깨 높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몇 번의 짧은 눈 맞춤. 그 찰나의 시선만으로도 우리는 모든 것을 주고받았다. 내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공중에 원을 그리면 너는 동선을 반 걸음 뒤로 빼 주었다. 입술만 열어 ‘조금 느리게’라고 속삭이면, 너는 무전기에 '조금만 늦춰주세요'라고 정확히 전달했다. 나는 말을 줄였고, 너는 더욱 정확히 알아챘다. 말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우리가 비로소 같은 호흡에 들어섰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무대를 온전히 믿는 것처럼, 너를 믿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 나는 햄릿의 독백을 떠올렸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그 독백이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 위 로미오의 대사보다 내 심장 안에서 더 크게 울렸다.
공연장 문틈으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배우들의 목 가다듬는 소리, 조명팀의 초조한 손동작, 무선 마이크 수신기의 빨간 점이 켜지는 순간들. 막이 오르기 직전의 신호들이 한 편의 짧은 연극처럼 쌓여갔다. '스탠바이.' 내 목소리가 무전기로 낮게 흘렀다. 막이 올랐다. 연극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배우가 대사를 잊는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무대 앞 조감독, 운용이에게 대사가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있게 했다. 그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로미오 역 배우의 입술이 허공에서 멈췄다. 숨 막히는 침묵이 객석으로 번졌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무대 앞을 훑었지만 운용이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본능적으로 뛰쳐나가려던 바로 그때, 네가 낮은 자세로 달려와 스케치북을 들고 로미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 눈이 마주쳤다. 서로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침묵의 교감만으로도 모든 것이 통했다. 로미오 역 배우는 자연스럽게 대사를 이어갔고, 객석은 그 순간을 연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음악이 흐르고, 연무 사이로 환한 빛줄기가 부서졌다. 객석의 박수가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왔다. 복도 유리창에 반사된 무대 불빛이 황홀하게 흘렀다. 그 강렬한 물결이 내 온몸을 짜릿하게 스쳐 갔다. 커튼콜이 끝날 즈음, 멀리서 너와 눈이 딱 맞았다. 우리는 서로에게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방금 함께 넘긴 그 한 호흡이, 이 모든 것을 살려냈다. 귓불에 남은 뜨거운 열기. 그때 나는 알았다. 오늘부터 우리는 같은 호흡으로, 같은 꿈을 꾸며 살게 되리라는 것을.
연극제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무대 앞은 축하와 사진 세례로 가득했다. 공연 중 자리를 비웠던 운용이가 뒤늦게 나타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조금 떨어져 있던 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저 친구일 텐데."
어수선한 무대 위, 소품 상자 안에 놓인 플라스틱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을 완성했던, 그러나 오늘 우리의 성공을 가능케 했던 그 작은 칼. 나는 잠시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플라스틱 칼끝 위로, 조금 전 너와 나누었던 짧은 눈 맞춤의 열기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감격을 간직하고 싶어 무대 뒤편 의자에 잠시 앉아 숨을 골랐다. 불현듯 시선이 닿은 곳. 나를 몰래 지켜보던 너를, 나는 그제야 발견했다. 들킨 줄 알고 화들짝 놀라 자리를 뜨려는 네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찰나가 영원처럼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뒤풀이는 평소보다 더 큰 웃음으로 가득했다. 두 달을 갈아 넣은 노력과 성공적인 결과.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환희의 밤이었다. 소주병이 빠르게 쌓여갔고, 곧 과가(科歌) 합창이 시작되었다. 어떤 이들은 허무와 서운함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기도 했다.
들러붙은 부대찌개를 사이에 두고, 술이 오른 내 옆에 네가 앉았다. 네가 내 잔을 채우면, 나도 네 잔을 채웠다. 서로의 눈을 떼지 않은 채 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으며, 나는 물었다.
"혹시, 나 좋아해?"
너는 주저 없이 '네'라고 했다. 나는 네 눈빛에 술기운이 얼마나 서렸는지 확인하고 싶어, 짙어진 눈으로 너를 더 오래 바라봤다.
"학생회장 선배라서? 총감독 선배라서?"
되묻는 내 말에 너는 고개를 젓더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했다. 내 눈보다 훨씬 더 선명한 빛이 너의 눈에서 강하게 반짝였다. 나는 체념하듯 말했다.
"나, 여자 친구 있어."
잠깐 주춤하던 너도,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남자 친구가 있어요"
그 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응당 취해야만 하는 밤이 있었다면, 바로 그 밤이 그랬다.
서로 어색해 질만도 한데 우리는 그 후로도 학생회 일과 시험공부를 함께하며 서로를 챙겼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수록,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의 아쉬움은 커져갔다. 선배인 내가 너를 도운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네게서 더 많이 배웠다. 나는 매사에 계산하고 신중히 판단한 뒤 움직이는 편이었다. 반면 너는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나는 실수는 덜했지만 늘 한 박자 늦었고, 너는 가끔 실수를 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얻어냈다. 그것이 내게는 경이로움이었다. 너는 내가 되고 싶다고 했고, 나 또한 네게서 배우며 너처럼 변화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는 동안, 나는 어느새 너를 만나기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공부에 더 진심이 되었고, 학생회 일도 이전보다 더 꼼꼼해졌다. 그리고 너 덕분에, 나는 영화감독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막연한 말만 늘어놓던 나에게 너는 확실한 용기의 씨앗을 쥐여 주었다.
“선배님이 영화감독이 되는 걸 보고 싶어요. 꼭 그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 한마디가 내 가슴에 와서 깊이 뿌리를 내렸다. 나는 네가 믿는 내가 되기로, 그 순간 마음먹었다. 습작 중이던 시나리오의 여주인공은 점차 너였다. 한 편, 두 편, 원고가 모일수록 어느새 너는 나의 뮤즈가 되어 있었다. 뮤즈를 사랑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여자 친구와 헤어진 때가 아마 그때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