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은 결핍에서 온다. 이별도.
사랑은 발견에 가깝고, 이별은 발명에 가까웠다. 그때는 아직 절반만 알았다.
전 여자 친구와 나는 서로를 ‘내 반쪽’이라 불렀다. 연애 초반의 자신감은 쉽게 과장되었다. 종교, 취미, 돈, 결혼 같은 가치관쯤은 얼마든지 맞춰 갈 수 있다고 우리는 믿었다. 콩깍지로 시작된 마법은, 어긋나 있어야 정상인 것들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합을 맞춰 온 듯 정확히 들어맞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그 착각을 운명이라 불렀고, 플라톤의 ‘반쪽’을 찾았다며 서로를 찬양했다. 마법은 우리가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그럴듯한 주문을 입에 붙여주었다. '내가 먼저 연락하려던 참이었어.'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우리 통했나 보다.' 황홀은 언어의 낭비를 허락했고, 우리는 그 낭비를 사랑이라 불렀다.
사랑의 성벽은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익숙함이 들어오고 무료함이 그 뒤를 이었다. 균열은 먼저 말에 생겼다. '내가 연락한다고 했잖아.'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내가 이거 싫어하는 줄 몰랐어?' '우리, 안 맞는 것 같아.' 주문은 약발이 다했고, 균열은 의심을 통해 자랐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플라톤이라면 적어도 유효 기간에 대해 경고했어야 했다. 운명에도 분명 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자본의 속도도 우리 사이를 멀리 밀어냈다. 대학교 2학년 때 만난 그녀는, 내가 군대를 다녀오는 사이 졸업해 대기업에 입사했다. 나는 거역할 수 없는 흙수저였고, 늘 가난에 허덕였다. 가끔은 그녀에게 용돈을 받았다. 시공간이 멀어지자 ‘사소한 결핍’은 더 이상 사소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필요로 할 때, 그녀는 내 옆에 없었다.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곁에 있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안정된 직장, 그리고 그 이후의 더 안정된 결혼을 말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말들 속에서 심장이 뛰지 않았다. 대신 나는 선언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이제부터 다시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그녀는 마음대로 하라며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에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다가올 내일에 대한 불안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사랑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도 조금은 걸어와 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말 위에 더 잔인한 말을 얹었다.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더 이상 그녀에게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그녀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이며 물었다.
“그 후배 여자 때문이야?”
말끝에서 숨이 한 번 꺾였다. 분노는 빠져나가고, 마른 슬픔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두 번 말했다. 사실을 알면서도 한 거짓말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배려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녀는 등을 돌렸다. 어깨선이 아주 조금 내려앉았고, 그것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마지막이었다.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것들은 그날, 먼지처럼 천천히 내려앉았다.
며칠 뒤, 너는 예고 없이 내 자취방으로 왔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싶다'고 너는 말했다. 나는 이미 전 여자 친구와 관계를 끝냈다. 왜 너는 아직 미련하게 매달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목은 마르고 배도 고팠다. 우리는 오징어 짬뽕라면을 끓여 소주 몇 잔을 주고받았다. 너는 물었다. 전 여자 친구 생각은 안 나냐고. 나는 술기운을 빌렸다.
“생각나지 않아. 지금 너랑 있으니까.”
너는 낮게 중얼거렸다.
“나쁜 남자.”
그 말이 욕처럼 꽂히지 않고, 이상하게 체온처럼 남았다. 몇 잔 더 오간 뒤, 너는 내 어깨를 빌려도 되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었다. 그날 밤, 유난히 달이 컸다. 창틀 너머의 원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와 텅 빈 접시와 반쯤 비운 병 위에 얇은 빛을 얹었다. 코끝을 간질이던 그 비누 냄새는 오래된 기억처럼 선명했다. 네가 돌아간 뒤, 라면을 하나 더 끓여 먹고, 소주를 더 마셨다. 배고픔과 갈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무언가를 더 넣을수록 안쪽에서 더 크게 비어지는 밤이었다.
너는 내가 헤어졌다는 걸 알고도 한동안 너의 연애를 끝내지 않았다. 그때 첫 질투가 생겼다. 전 여자 친구에게서 채워지지 않던 허기진 공간으로 네가 스며들자 허기는 잠시 잊혔지만, 이내 새로운 갈증이 찾아왔다. 너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결핍이었다. 내가 아닌 그 남자에게 보냈을 너의 미소를 상상하자 속이 비틀렸다. 그 상상은 미움으로, 미움은 너를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했다. 부름을 기다리는 개처럼 전화기 앞에서 시간을 갉아먹었다. 너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사랑은 사람을 영리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제의 이성을 반납하고 오늘의 충동을 임대하는, 미련한 짓을 하게 했다.
그 밤의 달은 한동안 내 창가에 붙어 있었다. 접시 바닥의 붉은 국물 자국처럼, 잔의 가장자리에 남은 소주 냄새처럼 느리게 사라졌다. 배고픔은 다음 날 아침에서야 겨우 가셨지만, 대신 다른 허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네가 부르지 않은 이름을 나는 속으로 여러 번 불렀다. 불러도 닿지 않는 그 이름은 오래도록 목을 마르게 했다.
그 목마름을, 나는 사랑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목마름이 더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순간을, 이별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