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노란 색채의 스탠드 불빛. 불이 꺼진 방. 침대에 등을 기대고 글을 적는 나. 틱틱거리는 노트북 자판. 떨리는 다리. 다리에 걸친 천으로 된 시원한 이불. 나와 상관없는 곳에 닿는 선풍기 바람. 삐뚤어진 의자. 가지런한 책들, 수납함들. 복도에서 비쳐오는 서늘한 조명. 열린 청색 커튼. 창밖의 떨리는 불빛들. 그 불빛들을 잠시 바라보는 나. 타오르는 생각들. 모든 것이 소각되는 시간. 밤 12시 반. 모두가 잠든 시간.
외로움에 의지해서, 불안함에 의지해서, 그 어떤 것에 의지해서도 글을 적지 않으려고 하는 나. 이제 그런 것들은 질렸어. 하고 움직이지 않는 머리, 나의 돼지 저금통 속에서 오백 원짜리를 찾으려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나. 산책을 해보지만. 사람들 사이를 걸어보지만. 나무 아래를 걸어보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고. 결국 땀에 절여진 채로 방으로 돌아와서 이 이상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 나.
연노란 색채의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막연하게 떠오르는 것은 대낮의 푸른 나무들. 나뭇잎들의 흔들림. 떨림. 나뭇잎들의 목소리. 모공에서 흐르는 땀. 나뭇잎들의 냄새. 나뭇잎들의 눈빛, 표정, 말투. 항상 그들은 내게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 사람과 달리. 좋은 이야기만 듣고 살 수는 없겠지만. 난 나무랑 있을 때 행복해. 난 나무랑 있을 때 자유로워져. 왜 이야기를 했더라. 난 지금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넌 지금 자유롭지 못해. 온갖 것들에 꽁꽁 묶여 있지. 눈사람이 눈에 발이 묶여 그 자리에서 얼어가듯이, 다음날 해가 뜨면 다 녹아버리듯이. 넌 눈사람이야. 넌 아직도 A4 한 장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지. 그건 네 무수한 강박들 중 하나야. 가장 드러나는 것일 뿐. 옛날엔 자유로웠잖아. 어떤 글을 써도 당당했고, 당차게 글을 써 내려갔고. A4 10장을 기준하는 단편소설도. A4 1-2장을 기준하는 에세이도. 너를 얽매이지 못했지. 넌 자유로웠어.
철창이 있는 방. 그리로 살며시 불어오는 새벽바람. 어스름을 닦는 선분홍 여명. 방구석에 놓인 독서실용 책상. 가지런히 정돈된 책들. 사각사각하는 연필 소리. 네 원고지에 채워지는 검은 글씨들. 얇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팔을 놀리는 너. 남은 온기가 지워져 가는 너의 침대. 바람에 팔랑거리는 원고지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귀를 깨우는. 폰에서 울려오는 알람 소리. 아침 6시 반. 부지런한 사람들이 깨어나는 시각.
그때 너는 글을 썼어. 호수 위의 아이가 호수를 벗어나 세상으로 가는 글을. 세상을 뛰어넘은 아이가 하늘로 가는 글을. 그때 네 가슴은 이상으로 가득 찼어. 눈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지. 책들, 책들을 너는 사랑했어. 오후 4시 반의 노란 햇살이, 버스 차창을 간질일 때. 너는 창유리를 열고 바람을 맞았지. 책장은 바람에 날아갔어. 그래도 넌 붙잡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 너는 왜 그러지 못하니. 뭐가 그리 널 속박하고 있는 건데? 나도 몰라. 두려움? 소심한 새가슴? 병마? 모든 것이 원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모든 것을 탓하기도 이제 너무 지겨워. 아리송해. 모든 세월이 그리 빨리 지나갔다는 게. 아침의 청소부처럼 인생의 거리를 순식간에 쓸었다는 게 너무 이상해. 난 책장을 흘려버릴래. 글자들이 날 속박하지 못하도록. 난 책장을 흘려버릴래.
책이 찢어져서 그 페이지를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상관없어. 책은 많으니까. 책도 많고. 내게는 남은 인생이 있고. 내가 써야 할 글들이 많아. 난 조급해지지 않을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인생은 기니까. 네가 그럴 수 있을까? 넌 속박되어 있잖아. 일단 네 말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볼 일. 난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난 나에게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래.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말 따위. 다 거짓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