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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세상은 타자에 관한 이야기

예술지상주의 탈피

by 커피탄 리

‘기차가 지나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의 철로를 지나간다. 기차는 터널로 들어간다. 긴 터널을 통과해 다시 드넓게 펼쳐진 논밭 사이에 놓인 선로를 지나간다. 순식간에 기차는 점이 된다. 점이 된 기차는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간다. 사라져 간다. 젊음도 그렇다. 톰 웨이츠의 노래 가사처럼. 젊음은 멀어질수록 작아져 간다.’ (Time, Tom Waits, 1985) 난 기다란 젊음의 선로를 가는 동안 무얼 하기로 결정했나. 축구? 무역? 용접? 운전? 사무일? 공부? 과학 연구? 난 글을 쓰기로 작정한 것 같다. 글을 쓰는 동안 경험했던 희로애락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터놓고 말하자면 난 글을 쓰면서 꽤 오랜 기간을 방종한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무절제했달까. 시간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 밤이면 밤마다 글을 쓴다고 수면을 잘 조절하지 못했다. 이는 들쭉날쭉한 컨디션과 정신 상태를 낳았다. 그렇다고 낮에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술도 많이 마셨다. 방에서 맥주병을 들고 앉아 물처럼 마신 적도 있었다. 방에서 줄담배를 피워댔다. 최근에는 유튜브와 SNS를 보기도 멈추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도 줄기차게 보았다. 플롯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만 난 이 모든 것들이 예술가가 되기 위한 내 나름의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방에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예술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것. 외로울 때 혼자 소주병을 들고 공원에 앉아 병나발을 부는 것. 감정이 이끄는 대로 시를 적으며, 그게 최고의 예술이라고 자위하는 것. 소설도, 미술도. 그러는 동안 5년이 지났다. 글쓰기 실력 같은 건 진보했을지도 모르나, 내 정신과 건강은 점점 시들어갔다. 뒤늦게 하나님을 찾는다고, 내 잘못된 습관이 바로 고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건강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저 구석에 밀어두었던 운동을 해야 했다. 하기 싫다고 치워뒀던 것들을 하나, 둘 불러들여야 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 않던 희생, 봉사, 사랑 따위. 예술을 위해서라면, 모두 한 유리병에 담아 멀리 던져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먼저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사랑하며 자신을 가꾼 뒤,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베풀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몸이 움직이기 이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나는 욕망에 지배받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 애석하게도.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 또한 젊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작가란 도덕적 기준이 완벽한 사람을 말한다. 유교문화권의 우리는 ‘선비’의 후예로서 예술적 감성이 뛰어나며 누구보다도 고고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작가’라고 부른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서구권에서 작가의 이미지는 다르다. 술, 담배, 심지어 마약에까지 손을 대면서, 모든 이성을 두루 섭렵하고, 예술적 재능이 특출난 특이한 사람을 ‘작가 혹은 예술가’라고 부른다. 내 표현이 얼마간 과장되었을지는 모르나,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 생각난다. 그런데 이 서구적인 삶의 스타일이, 20세기 이후 한국에 수입되면서, 한국에도 서구적 유형의 예술가들이 많이 생겨난 것 같다. 선비로 인식되는 작가의, 예술가의 삶이 무절제, 방종과 맞닿아 있다는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가장 타자를 위해야 할 예술이란 장르에서, 자기 자신을 외치다니. 이건 인류 창조의 목적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타자를 위해 쓰는 것,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가. -

적어도 나는 이제 그런 삶을 멀리하려고 한다. 대신 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것들에 – 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작고 비루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 관심을 가지기로 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가장 게을리했던 일 말이다. 나 자신을 – 정확히는 나 자신의 욕망을 – 위해 사는 습관을 버리고 타자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 지금 나는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의 삶의 방향성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관찰은 관심이다. 먼저는 나 자신의 마음, 몸에 대한 관심이다. 나 자신을 잘 돌아보고 – 나 자신을 위해 산다는 말은, 나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산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도록 돌보는 일. 두 번째는 작고 비루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다. 벌레, 풀, 강아지, 고양이, 전봇대, 꽃, 나뭇잎, 나무줄기, 노숙자, 장애인, 소외된 사람들 등등등. 타인과 타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무를 관찰하지 않고서는 나무에 관한 글을 적을 수 없다. 나무에 관심을 갖지 않고서는 나무를 관찰할 수 없다. 과거 나는 나무를 관찰하려고 애썼으면서도 나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관심은 관찰이다. 관심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다. 나는 이 삶을 지향할 것이고, 이 삶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면 내 젊음의 기차가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흘린 핏방울, 땀방울을 보며, 스스로를 대견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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