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씨이다.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 –‘푸른’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빛깔의 하늘 색채, 빛나는 구름, 흰색부터 짙은 회색까지 구름의 그라데이션, 구름 사이 뚫린 푸른 점, - 이었는데, 어느새 구름은 비를 뿌리더니, 빛나는 뱀의 꼬리가 간간이 보이는 잿빛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날엔 수영강 다리에 서서 도도하게 흘러가는 물을 구경하는 모양이 좋다. 강바람이 불러일으키는 물 비린내와 비 냄새를 맡으며, 또 거세게 전주(前奏)를 하는 바람을 만끽하며. 하지만 나는 시내 카페에 있다. B형과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눈 뒤, 혼자 동떨어져서 카페 구석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다 마신 음료 잔은 쟁반 위에 세워둔 채. 풀들이 바람에 바스러지는 소리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어폰 너머로 흘리면서. 글을 적을 준비를 하고 있다. 역시 이런 날에는 수영강 다리 위에 혼자 서 있어야 한다. 혼자 센텀시티에 가지 않은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다리에서 강변을 내려다보면, 강변을 달리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중년 부부나, 지팡이에 의지해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노인도 보인다. 언제라도 비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이다. 땅이 비와 만나듯이, 사람은 살면서 많은 다른 사람을 만난다. 기억나는 것은 그 사람의 향취, 그 사람의 눈빛, 그 사람의 말 따위다. - 안 좋은 기억이 오래 남기도 한다. - 누군가 말했다. 죽기 전에 남는 것은, 사람과 그 사람과 보냈던 추억뿐이라고.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 말에도 동의한다. 사람은 정말이지 이기적이고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상종 못 할 존재라고. 카페에는, 수영강 다리에는 꽤 많은 수의 커플들이 보이는데, 나는 이 커플들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내가 그랬듯이. ‘기간제 베프’라는 말의 어감이 좋지 않아 좋아하지 않았는데, 내게도 현실로 다가오고 보니 더 싫어하게 되었다. 연인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는, 좋을 땐 베프일 수 있어도, 좋지 않을 땐, 하찮은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손절’을 예사로 하는 시대에는 더 그렇다.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고, 낙뢰가 구름 끝에서 떨어질 준비를 하는 날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침울해진다. 그 마음은 마치, 헤어지기 직전의 상태와 같다. 부모님의 전근으로, 오래 사귄 친구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직장이나 학교를 가는 문제로 고향 친구와 헤어지는 상황. 말다툼으로 싸움으로,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지는 상황. 모든 상황은 하나의 정서를 공유한다. 그 슬픔 – 외로움, 공허함 - 이라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혼자 있을 때 연약하고, 서로 연합하기를 좋아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기를 선택하는가. 슬픈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세상이 전처럼 유쾌하지 않다는 것은 입을 다문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서 일 것이다. 먹구름이 하늘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사람들은 주로 몰입할 거리를 찾는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럴 때 컴퓨터나 핸드폰 자판을 찾는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감정을 자판 위에 쏟아부어 진정시키기 위해. 물론, 나는 글을 그런 목적으로 쓰지 않는다. 감정을 써내려야 할 단계는 지났다. 아기가 젖을 먹듯, 좀 더 자라서 이유식을 먹듯, 글쓰기의 성장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무수한 성장의 계단을 오르며 먹구름을 보고, 비를 맞고, 맑은 하늘을 보고. 또 먹구름을 보고, 비를 맞고, 맑은 하늘을 보고. 그렇게 글쓰기도 성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 자기 자신을 비하하지도 과신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 그저 묵묵하게 ‘자기’ 글을 쓰는 것. ‘자기’ 글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그 글을 쓰기 위해 분투하는 것. 이것은 축구나 야구에도, 다른 모든 스포츠나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내가 ‘자기’ 글을 쓰는 이유는, 나 혼자 보고 좋아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많은 말을 논리정연하게 한 번에 쏟아낼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이 사실에 좌절하고 있을 때,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신은 내게 기름이 잘든 부드러운 혀를 주시지 않으셨지만, 내게 누구보다 날렵하고 부드러운 손을 주셨다. 이 생각은 날 살렸다. 물론 글을 잘 써도, 사람들과 소통할 만한 글을 잘 써서 사람들과 대화해도, 애로사항이 존재할 것이다.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또 소통 도중에 기분이 틀어져서 관계를 끊는 경우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랑 똑같다. 사람은 어떤 생명체보다 고등하고 사랑스럽지만, 어떤 존재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 - 결국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 안의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 글 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글 세계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사람이다. 사람들과 오래 친하게 지내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한다. 사람과 사람은 언제고 틀어질 수도 있으므로. 10년 전에 마음 맞던 사람이, 10년 뒤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사람은 매 순간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므로, 사람에게 신뢰를 주되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구름도, 다른 구름과 떨어져 있어야 아름다운 하늘이 보이는 것처럼.
비구름이 지나가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강변을 산책하거나 뛰는 일, 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일, 산책하러 나온 강아지와 인사하는 일. 이런 일들은 삶의 기쁨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가뭄 끝의 비가 내리면 그 맛이 달달한 것처럼,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나 같은 사람은 주기적으로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시간 중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야 할 것이다. 먹구름 낀 항구에서 물살에 출렁이는 배들을 보며 마음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돛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과 친해져야 할 것이다. 짐노페디 1번, 2번, 3번을 들으며 몽상과 안정에 잠겨야 할 것이다.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달려온다. 아마 땀에 흠뻑 젖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 대체적으로 사람이 내게 달려오면 나는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와 친해지는 것을 유보할 것이다. 24세의 나와는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