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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그곳에서 소년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

by 커피탄 리

미끄러져 간다. 오솔길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나뭇잎들에 뺨이 닿는다. 멀리 푸른 산 위로 더 푸른 하늘이 팔을 포개고 있다. 하늘은 구름을 입으로 불어 저리로, 저리로 보낸다. 나는 미끄러져 간다. 황톳길이 나를 빨아들인다. 수십 개의 손을 뻗어 내 몸을 제 몸으로 붙인다. 나는 자빠지지 않고 간신히 균형을 유지한다. 걸음은 나를 앞으로 인도한다. 숲은 갈수록 더 짙푸르러 진다.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이 보인다. 동굴 속에는 빛이. 어둠이 아니라 밝은 빛이 보인다. 눈이 부셔 앞으로 갈 수 없다. 그러나 걸음은, 날 그리로 이끈다. 동굴 속에는, 역시 어둠이 있다. 동굴 끝에는 환한 빛이 있다. 그 너머는 들판일까? 동굴 속에는 한 소년이, 동굴에 난 창문 – 푸른 하늘이 있는 – 앞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멀뚱히 그를 쳐다본다. 내 걸음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걸음은 재빠르게 소년을 지나친다. 나는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디선가 많이 봤던 얼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 내 심장과 다리는 - 빠르게 빛을 향해 달린다. 빛 너머엔, 들판이 있다. 세상 어느 곳보다도 환하고 푸른 들판이.


나는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를 들여다본다. 하나같이 창문이 있고, 음악이 냄새처럼 흐르는 곳이다. 어떤 곳에서는 사티의 음악이 흐르고, 어떤 곳에서는 라벨의 음악이 흐른다. 어떤 곳에서는 슈베르트의 음악이 흐르고, 어떤 곳에서는 바흐의 음악이 흐른다. 거기 앉아 있는 인물들은, 글을 쓰거나, 글을 쓰고 있지 않거나, 확신 없이 방을 돌아다니거나, 그림 도구를 만지작거리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복싱 글러브를 끼고 섀도복싱을 하거나, 축구공을 혼자 굴리거나 하는 둥 다양한 모양이다. 그 인물들에게 말을 걸어보면, 하나같이 말이 없다. 그들은 웃지도 않고 흐린 눈으로 뭔가를 내게 보여주는데, 이것은 기억의 심연이다. 대부분은 까만 경우가 많지만, 개중에서도 보이는 기억이 있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세게 치면, 소리가 홀을 울리는 것처럼, 그 이미지는 선연하다. 어떻게 그런 것일까? 머릿속에 영사기라도 설치해 놓은 것처럼. 인간은 기억으로 된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살이던 내가 지금의 나이가 되기까지 이십몇 년의 시간이 그야말로 ‘쏜 살’처럼 지나갔다. 팔십도 이렇게 금방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 내가 가질 감정은 지금과 엇비슷할 것이다. 허무함과 아련함. 지금도 그렇듯이 이 두 사슬은 동시에 나를 얽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도 떠올리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묘한 감정의 기억이란, 언제 내 가슴으로 내려오는 걸까? 이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 아파트 부근을 산책하다가 떠오른 이 생각은, 생각의 고리를 물고 물어 내게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해 줬다. 거인처럼 생긴 아파트. 나는 이 생각을 열여덟 때 처음으로 했다. 『진격의 거인』을 보고 난 직후라 그랬는지, 거인처럼 거대한 아파트가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날 밟아버리거나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른다. 아무튼, 거인처럼 생긴 아파트는 내게 옛 기억을 떠올려줬다. 작년까지 약 2년 동안 살던 아파트. 그 산동네 아파트는 정말이지 볼품없었다. 비가 오면 물비늘이 산의 경사면으로 내려와 거동을 불편하게 했다. 내려갈 때는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쳐 내 몸을 전율하게 했다. 정말이지 그 볼품없는 아파트에서 엄마와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기억이 왜 나는지. 그리고 소설 모임을 마치고 새벽이 되어 오르던 그 산이 왜 생각이 나는지. 모를 일이다. 또, 그 직전에 2년 동안 살았던 어느 어촌의 아파트가 기억이 난다. 그 아파트 역시 산꼭대기 쪽에 있는 외딴 아파트였다. 비바람의 세기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입지에 있는 건물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근처 호수 공원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곤 했다. 그 이외에는, 글을 썼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썼던 것 같다. 내가 한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가끔은 이젤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렸다. 그 기간의 공통점이라면, 내가 아팠고 약을 먹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간을 돌이켜 봤을 때, 그 모든 요소들이 종합되어 내게 아련한 기억을 택배 상자처럼 배송해 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면, 어디든 쉽게 정이 드는 내 성격이 기억의 아련한 재생에 한몫을 했거나.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아련했던 시기는 언제일까? 열아홉, 수능 공부를 포기하고 미술 입시를 시작했을 때이다. 우울감에 차 입시 미술 학원을 다니던 나. 나는 한 손에는 화구통을 한 손에는 소설책을 들고 학원에 간다. 나는 스스로 외톨이를 자처한다. 학원 아이들이 말을 걸어도,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해도 늘 책을 읽는다.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말하기 대신 독서를 선택한다. 아이들이 착해서 왕따를 당하지는 않는다. 학원 앞거리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들. 가을 내내 동네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던 은행나무, 거기서 노란 비가 내리면, 음울한 클래식을 들으며 그 길을 걷는 나. 떨어진 은행잎을 밟으며. 손에는 시집을 들고. 온통 노란 세상. 노랗게 물드는 내 가슴. 내 가슴은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아주 오래 기다리고 있다. 하늘은 늘 회백색이다. 나는 이내 학원의 한 여자아이를 짝사랑하게 된다. 짝사랑에 실패한다. 그해 겨울, 이듬해에도 은행나무들이 서 있던 그 자리를 떠돈다. 은행잎이 다시 떨어진다.
레코드는 거꾸로 돌아간다. 나는 기억의 갈림길에서 미래로 돌아오는 길 대신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그곳은 한 시골 동네. 벌판에는 전신주가 줄지어 서 있고, 화물트럭들이 매서운 기세로 도로를 지나간다. 도로 뒤편으로, 맵시 없이 펼쳐진 논밭이 보이고. 논밭 주위의 송전탑과 깎아지른 산들이 보인다. 을씨년스러운 하늘과 하늘을 담고 있는 말라붙은 하천. 강변의 젓갈 냄새나는 공장들. 도로변에 일렬로 늘어선 허물어진 상가들. 갈 곳 잃은 두루미들. 다 터진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고양이들. 나는 그 길을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걸어 올라간다. 나뭇잎 하나 없는 숲을 지나, 방 창문에 철창이 달린 아파트 내 방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글을 쓴다. 글을 쓴다. 밤이고 낮이고 글을 쓴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된다. 눈이 온다. 눈송이 사이로, 저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 한 청년이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는 몹시 지치고 급한 발걸음으로 온다.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의 표정은 매우 서글프다. 나는 그에게 인사하지 못한다, 어디선가 많이 봤던 얼굴임에도. 나는 미끄러져 간다. 내 손은 미끄러져 간다. 쓰고는 있지만 무엇도 쓰고 있지 못하다. 마음이 혼란스럽다. 왜일까?


여행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다시 글을 적는다. 기억을 들여다보면, 깊고 어둡고 아련한 느낌이 든다. 인간에게 기억은 왜 주어진 것일까? 나는 기억을 많이 먹었다. 너무 슬펐다. 나는 기억을 먹고사는 존재이다. 먹고 토해낸다는 점에 있어서, 기억은 음식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아 무한해 보이는 기억은, 실상 정말이지 덧없고 늘 우리가 손에 잡고 있는 것이다. 잡고 있던 기억을 놓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으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여전히 기억은 친구의 손처럼 내 손을 붙잡고 있기에. 내 기억 속의 소년은 아직도 지금의 날 바라보며 - 희망에 차서 - 글을 적고 있고, 지금의 청년은 그 소년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못난 사람이다. 정말 못난 사람이다. 앞으로 그 청년이 어떤 기억을 만들어 디저트로 소년에게 줄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노인이 되는 소년은 과연 모두가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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