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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우기

by 커피탄 리

외로울 때

외로울 때면 창밖에 비가 내리고, 나는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 대신 창문에 기대선다. 창문에 맺힌 빗방울을 세어보고, 철 난간을 울리는 세 번 이상의 빗소리를 들으며 무언가를 몽상한다. 무언가를 몽상하다가 가슴을 부여잡고 창가로부터 멀어진다. 이런 슬픔은 언제부터 내게 왔을까. 책. 책으로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10년 전엔 책에 내 영혼을 내주었지. 그땐 독서로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이 없었지. 나무. 나무는 장대 같은 비에 흠뻑 젖었겠지. 원래의 아름다운 초록빛을 잠시 잃어버린 채 말야. 이제 나무 아래로 가도 비만 맞겠지. 나무 아래 누워 책을 볼 수는 없을 거야, 아마. 촛불. 촛불은 꺼진 지 오래. 초가 살아 있을 땐, 내 방안에 모든 사물들이 살아 있었지. 책상도, 책상 위의 도구들도, 책들도. 옷장과 옷장 속의 옷들도. 싱크대와 물이 떨어지는 그릇들도. 그러나 이제는 초가 꺼지고 모든 것은 숨을 잃어버린 지 오래. 외로울 때. 외로울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빛이 들지 않는 어둑하고 가난한 방 침대에 누워 있지. 난 그래.

인정받고 싶을 때

인정받고 싶을 때. 그럴 때면 날이 화창해지지, 꿈결처럼. 나뭇잎에서는 남은 빗물들이 떨어져 내리고, 아스팔트 위엔 물웅덩이 자국들이 남아있고 난, 난 외로움에 허덕이다가 드디어 집을 나선다. 시내로 간다. 사람들이 듬성듬성 있는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간다.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비가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그들은 핸드폰을 보지. 무수한 핸드폰 화면들. 그 속엔 사람들의 외로움이 살고 있지. 난 그들을 쳐다보지 않는다. 내가 인정받고 싶은 대상은 오직 너. 너는 시내의 어느 구석에 있는 산 위에 있다. 산으로 가는 길, 거기엔 몇 개의 엘리베이터가 있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오른다.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오른다. 이윽고 네가 있는 공원에 도착한다. 네가 있는 공원에는 주로 노인들이 있다. 그들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거나, 천천히 공원을 돌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게 아니라서, 내가 인정받고 싶은 대상은 오직 너라서. 그들을 나뭇잎처럼 헤치며 공원 가장 깊숙한 곳으로 간다. 거기엔 커다란 나무가 있어, 둘레도 아주 굵고 잎사귀도 머리만 하다. 나는 그 앞에 선다. 사람들이 다 사라지기까지 기다렸다가 너를 끌어안는다. 나무, 내게 향기로운 숨결을 줘. 부드러운 살결을 줘. 향기 나는 머리칼을 줘. 나는 네게 인정받고 싶다. 너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으면서도 나를 거부한다. 너는 시들어간다. 썩어간다. 너의 머리카락도, 너의 몸통도, 두툼한 너의 입술도. 이제 네 몸에선 썩은 내가 진동하고, 난 거기서 떨어진다. 난 오늘도 수없이 너를 만나고, 너는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꿈결같이. 이건 꿈이라서 난 또다시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옆집에 사는 친척 사이.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서로를 빼놓고는 살 수가 없다.

거절의 상처를 받을 때

거절의 상처를 받을 때, 그건 한 단위로 찾아오지 않는다. 그건 수십의 단위로 찾아온다. 어렸을 때, 네게 물린 상처. 어렸을 때 네게 베인 상처. 좀 더 자라서 네게 찔린 상처, 좀 더 사라져 네게 할퀸 상처. 스무 살이 되어서 네게 데인 상처, 지금도 아리는 상처. 좀 더 시간이 지나서 날 태워버린 너. 내 상처는 이제 높은 산처럼 쌓여서, 어지간한 청소부가 와도 치워줄 수가 없다. 물론 나도 치울 수가 없다. 평소에는 멀쩡해 보이다가도 나는, 평소에는 밝아 보이다가도 나는. 어느 날이 오면, 내 상처가 욱신거리는 날이 오면, 비가 내 상처에 떨어져 상처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 나는 먹고 마신 걸 다 토해버리게 된다. 내 토사물은 아주 역하고 지저분하다. 비도 아주 조금씩 내릴 뿐이다. 내 상처를 쥐고 어디로 가야 하나. 구슬픈 옛날 노래를 불러야 하나. 노래는 치유해 주지 못하네. 나무를 저주하고 태워버리면 내 상처가 사라질까? 아니, 산이 사라질 뿐이라네. 난 누구의 답장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난 누구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난 더 이상 내 글을 아무에게도 전해주지 않을 것이다.

피하고 싶을 때

피하고 싶을 때, 그런 날이 있다. 사람들이 날 모두 이상하게 보는 것 같을 때. 그런 날이 있다. 나는 비루한데 남들은 부둣가 선착장의 신사들처럼, 모두가 멋진 옷을 입고 선창가를 거니는, 그런 날이 있다. 사람들은 아주 사교적이고 예의 바르고 점잖다. 실상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믿고 싶은 날이 있다. 나는 비루한 나 자신을 미워하기에. 내 머릿속에는 매일 날 혼내는 훈장님이 살고 계시기에. 사람들의 성품을 바꿔놓고서라도 날 욕하고 싶은 날이 있다. 사람들은 사실 성품이 좋지 못하다. 그렇기에 실제로 날 흉보고 미워한다. 그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난 그들을 믿지 못하겠다. 아, 내가 눕고 숨 쉴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다른 누군가를 만나봤자, 그는 내게 실망할 것이다. 또 나도 그에게 실망할 것이다. 친구는 한시적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난 지쳤다.

무너질 때

무너질 때, 그럴 때면 나는 완전히 아스팔트에 맥반석 오징어처럼 달라붙어 있다. 비도, 햇빛도 내리지 않는다. 정적의 하늘. 정적의 대기. 정적의 땅. 이런 것들이 내가 질식할 정도로 날 몰아붙인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디에 있나. 그들은 집에 있다. 더러는 일터에 있다. 그들은 또 하루 바쁘게 일상을 살아낸다. 난 부랑자같이 대지 위를 걸어 다닌다. 사막이라 비유하면 좋을 텐데 여기는 사막도 없다. 끝도 없이 펼쳐진 아스팔트가 있을 뿐이다. 산의 품 안에는 아파트 단지들이, 나무의 품 안에는 새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의 품에도 안기지 못한다. 여기는 온대 기후, 아니 아열대 기후의 아주 살기 좋은 풍토의 땅이다. 그러나 내가 쉴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영원히 방랑하는 저주를 받은 것처럼. - 난 길에 쓰러진다. - 그렇게 10년의 세월을 살았다.

내가 먼저 신을 찾았는지, 신이 먼저 내게 다가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지금 신의 집에 있고, 신은 아무 말 없이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와 실험도구들을 만지고 있다. 그는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또 뭘 위해 나를 자기 집 침대에 눕혀 놓았을까. 나는 그의 뒷모습만 볼뿐이다. 나는 말한다. "날 사랑하나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플라스크를 정돈한다. 그리고 닫혀 있던 창문을 연다. 그러자 숲의 새들이 와서 신의 집 창에 깃든다. 햇빛이 내려와 그 새들을 비춘다. 그는 날 쳐다본다. 나도 그를, 새들을 번갈아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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