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시를 낭송하는 즐거움

- 백석 시의 특징을 중심으로

by 시샘 김양경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빨리 잊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흙냄새와, 잊혀진 언어들이 가진 '맛'을. 내가 백석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느낀 가장 강렬한 감정은 바로 이 잊혀진 맛의 발견이었다. 백석의 시는 종이가 아닌 입과 혀와 목청으로 읽어야 그 참맛이 드러나는 독특한 언어 유산이다. 그의 시를 낭송하는 것은 단순한 문학 감상을 넘어, 우리말의 가장 깊고 따뜻한 근원을 찾아 떠나는 즐거운 여행이다.


전국백석시낭송대회 ,왼편부터 김형근 심사위원, 시샘 김양경 협회장, 대상 수상자 이관종 시낭송가

첫째, 살아 숨 쉬는 토속어의 향연

백석 시 낭송의 즐거움은 단연코 텃말과 토속어의 생동감에 있다. '호리낭창', '가즈랑집', '들쿠레한' 같은 어휘들은 눈으로 볼 때는 사전을 찾아야 할 낯선 낱말이지만, 입을 통해 소리 내는 순간 우리의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한국인의 텃말 정서를 흔들어 깨운다.

특히 그가 즐겨 사용했던 평안도 텃말들은 낭송할 때마다 독특한 운율과 억양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단순히 사투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삶이 스며 있는 언어의 경계를 넓히는 행위이다. 낭송을 통해 우리는 잊혀 가던 우리의 풍물과 세시풍속을 눈앞에 재현하고, 그 언어들이 품고 있던 공동체의 따스한 숨결을 되찾는 기쁨을 누린다. 그의 시 '여우난곬족'을 소리 내어 읽을 때 느껴지는 명절날의 분주함과 넉넉한 인심은, 어떤 활자도 담아낼 수 없는 구체적인 정서로 우리 마음을 채운다.


여우난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보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 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찰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 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대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1935. 12. 『조광』1권 2호. 이후 시집 『사슴』에 재수록

백석시낭송아카데미의 시낭송공연 안내 포스터


둘째, 이야기꾼이 되는 즐거움

백석의 시는 일반적인 서정시와 달리 서사성이 강한 이야기 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낭송자는 곧 그 이야기의 화자가 되어, 시 속 인물들의 삶과 감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낭송할 때, 우리는 눈이 푹푹 내리는 방에서 가난하지만 고결한 사랑을 꿈꾸는 한 청년이 된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읊을 때, 그 고독과 결연한 의지가 내 목소리를 타고 나의 마음에 울려 퍼진다. ‘여승’을 낭송하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는 여인의 서러움은 차가운 느낌으로 전해지고 동시에 그 공간에서 나는 독특한 가지취의 내음새도 맡게 되는데, 피부를 통해서, 코를 통해서 아주 세세하게 전해져서 마치 내가 그 현장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순간에 시를 읽는 이는 단순한 활자에서 인물의 삶의 모습을 재현해 내는 연극인이 된다. 소리에는 감정이 실리고, 낭송하는 이의 마음뿐 아니라, 그것을 듣는 이와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낭송하는 이와 듣는 이는 서로 마음이 소통되고 정화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전국백석시낭송대회 안내 리플릿


셋째, 쓸쓸함 속의 고결한 위로

백석 시는 가난하고 외로운 존재들을 향한 깊은 연민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를 낭송할 때, 우리는 그 연민에서 고결한 위로를 발견한다.

'흰 바람벽이 있어'를 낭송하며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라는 구절을 읊을 때, 가난과 외로움은 더 이상 비루한 것이 아니다. 낭송을 통해 그 감정들이 정갈하고 고독한 정신적 가치로 승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처럼 백석 시 낭송하는 것은 잃어버린 우리말의 원형적인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고독한 존재들의 외로움을 긍정하며, 우리 시대에 사라진 공동체의 온기를 되살리는 소중한 행위가 된다. 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과 삶의 숨결을 간직한 진정한 한국인이 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내 나라 내 말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벅찬 감격을 느끼게 된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힌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힌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힌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힌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것으로 호젓한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듯이 나를 울력하는듯이

눈질을하며 주먹질을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씨스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이라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시낭송대회에서 시낭송 공연 중인 시샘 김양경

넷째, 혀끝에서 되살아나는 풍류와 미감(味感)

백석 시 낭송이 주는 즐거움은 미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언어의 풍부함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단순한 음식 나열을 넘어선, 당시 공동체의 삶과 정서가 응축된 '음식의 언어'가 가득하다. 낭송자는 이 언어들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풍류와 미감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린다.

'국수'를 소리 내어 읊을 때의 그 “들쿠레한” 맛, “모밀국수”의 툭툭 끊기는 감촉, “따끈한 국수장국”의 후루룩 넘어가는 소리가 목청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가재미”나 “도미” 같은 해산물의 짭조름한 바다 냄새, 혹은 “호박잎”이나 “파래”가 가진 특유의 쌉쌀함이 낭송자의 입안 가득 감돈다. 이처럼 백석은 사물의 구체적인 질감과 맛, 냄새를 잃어버린 고어(古語)와 텃말을 통해 되살려낸다. 낭송은 그 언어들이 가진 조형성과 미감을 혀끝에서부터 목청까지 끌어올려, 청각을 넘어선 공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마치 잘 빚어진 옛 도자기를 만지듯, 그 언어들을 어루만지고 다듬어 소리 낼 때, 우리는 백석이 그려낸 그 시절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넉넉했던 삶의 '진짜 맛'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환경운동연합 한강의 인문학 살롱에서 시낭송 공연을 하는 태고 이관종과 해설을 맡아 진행을 하고 있는 시샘 김양경

선우사


낡은 나조반에 힌밥도 가재미도 나도나와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힌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무슨 이야기라도 다할것같다

우리들은 서로 믿없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고긴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탓이다


바람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소리를들으며 단이슬먹고 나이들은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배우며 다람쥐동무하고 자라난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히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하나 손아귀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않다


힌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같은건 밖에나도 좋을것같다


다섯째, 사라져가는 가족 공동체의 복원

백석 시 낭송은 뿔뿔이 흩어지고 해체된 현대의 가족상을 잠시나마 멈추게 하고, 따뜻했던 전통적 공동체의 이미지를 되살려낸다. 그의 시는 “아비”, “어미”, “누이” 등 가족 호칭과 관계를 섬세하게 다루며, 그들이 함께 지냈던 정겨운 공간을 펼쳐낸다.

특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가난한 청년이 꿈꾸는 따뜻한 방, '여우난곬족'에서 대가족이 함께 모여 명절을 보내는 왁자지껄한 풍경, 혹은 '통영'에서 느껴지는 그리운 누이의 정서 같은 것들은, 낭송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전달된다. 낭송자는 시를 읽는 행위 속에서 사라진 '집'의 온기를 회복하게 된다. 소리 내어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뱉어낼 때마다, 독자는 그 옛집의 문지방을 넘고, 안방의 따스한 아랫목에 앉아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위안을 얻는다. 이는 백석의 시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심리적 고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낭송은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장 직접적이고 정겨운 통로인 셈이다.

환경운동연합 한강 살롱에서 백석시낭송 공연의 해설을 맡아 진행하고 있는 시샘 김양경

이 모든 낭송의 즐거움은 결국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한국인으로서의 근원적 자아와 맞닿아 있다. 백석 시를 낭송하는 순간, 우리가 잊고 지날 뻔했던 모국어의 주인으로 다시 서게 된다. 이는 백석 시인이 평생 지키고자 했던 민족적 정서와 언어를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로 계승하는 숭고하고도 벅찬 일이다. 백석의 시를 입으로 부르는 것은, 곧 한국인의 가장 깊은 영혼을 노래하는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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