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21일 차

새해 불꽃놀이를 보다

by 홍유경

12월 31일은 시드니 전체가 마비되는 날이다.

아침부터 주요 도로가 통제되기 시작하고, 오후가 되면 대부분의 대중교통도 운행을 중단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자정에 펼쳐지는 시드니 불꽃놀이 때문이다.


여의도 불꽃놀이도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이 두려워 한 번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보지 못했다.

시드니 불꽃놀이는 그보다 더 심해 자정까지 기다려야 한다.

보통 10시 전후로 잠드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 시간까지 밖에 있을 수는 없어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그저 남의 축제였다.

우리는 오히려 12월 31일에는 시드니가 복잡할 테니 인파를 피해 시드니 외곽에 놀러 나갔다가 숙소에 돌아와서 일찍 잠드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바랑가루 워프를 따라 마치 전쟁 준비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바리케이드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 페리정류장, 트램정류장 곳곳에는 12월 31일의 교통편이 축소되거나 조기 종료된다는 안내 포스터가 붙었다.

원래 계획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시드니 외곽으로 나갔다가는 자칫 다시 숙소로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갈등하는 사이, 어느새 12월 31일이 되었다.

네이버 한인 카페에는 실시간으로 불꽃놀이 관련한 글이 올라왔다.

돌아가며 자리를 맡을 팀을 구하는 사람들, 아침 일찍부터 명당자리에 자리를 맡았다는 인증 글까지... 이미 시드니는 불꽃놀이를 맞이할 준비로 북새통이었다.


마음이 분주해졌다.

남편은 일단 숙소 주변 상황을 살펴보고 오겠다고 했다.

시드니 불꽃놀이 관련 공식 홈페이지에서 안내되는 여러 viewing point 중,

우리 숙소에서 갈 만한 곳은 observatory hill과 서큘러 키 두 곳이었다

Observatory hill은 높은 지대라 시야가 탁 트인다는 장점이 있었고,

서큘러 키는 하버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남편은 길을 걸으며 만나는 보안 요원들마다 물어보았다고 한다.

어린아이들과 함께라고 했더니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Observatory hill을 추천했다고 한다.

아마도 서큘러 키에 훨씬 더 많은 인파가 몰리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른 아침 observatory hill에 자리 잡은 카를로스 할아버지와 우리

그렇게 남편은 자리를 맡을 만한 돗자리와 비치타월 등을 챙겨서 observatory hill에 올라갔다.

남편은 그곳에서 52년째 시드니에서 새해 불꽃놀이를 본다는 카를로스 할아버지를 만났다.

카를로스 할아버지는 시드니 곳곳의 여러 viewing point를 다 다녀봤지만, 이 언덕에서 보는 불꽃놀이가 가장 멋지다며 자기를 믿어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오후 늦게나 돼야 이곳에 오신다고 했고

자신은 어차피 여기서 자리를 지키며 하루 종일 있을 거라며

우리 짐도 같이 봐줄 테니 아이들이랑 시내 구경이나 더 다녀오라며

우리 짐을 자신의 자리 옆으로 더 바짝 붙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양한 미술 체험이 가능한 호주 국립 해양 박물관 하버데크 공간

덕분에 우리는 아이들과 늦은 오후까지 호주 국립 해양 박물관 하버데크 공간에서

아이들 체험 수업에 참여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실 이곳은 우리에게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장소였다.

여러 번 찾아갔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드니에 머물던 해에는

하버데크 공간이 일요일에만 열고, 그것도 오후 3시까지만 운영한다고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오후가 되니 많은 사람들로 가득찬 observatory hill

박물관에서 돌아와 숙소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추울까 봐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observatory hill로 향했다.

아침에 남편이 보내준 사진에서는 언덕 위에는 우리와 카를로스 할아버지 자리 말고는 텅 비어 있었는데

몇 시간 사이 이곳은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돗자리와 돗자리 사이에 한 사람이 겨우 앉을 만한 간격만 있어도 새로운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왜 카를로스 할아버지가 우리 짐을 더 바짝 붙이라고 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언덕 제일 앞줄에 위치한 우리 자리

카를로스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뒤늦게 도착했음에도 언덕 맨 앞자리에 앉아 불꽃놀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카를로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아이들을 정말 예뻐해 주셨다.

덕분에 큰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수다를 떨며 지루할 수 있었던 기다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냈다.


그림을 그리며 지루한 시간을 달래는 둘째 아이

그림을 좋아하는 둘째 아이를 위해 숙소에서 그림 도구를 챙겨 갔다.

둘째 아이는 캄캄해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돗자리에 누워서 지루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저녁 9시가 다 되어갈 무렵의 풍경

저녁 9시가 가까워지면서 하늘은 이미 캄캄해지고 있었다.

자정까지 기다리기 힘든 어린아이 동반 가족들을 위해 준비된 9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Observatory hill에는 온전히 이번 행사를 위해 이동식 간이 화장실이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고,

푸드트럭도 자리해 있어 배고픔을 달랠 수도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언덕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함께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5, 14, 13, 12, 11, 10, 9, 8, 7 … two, one!!!”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영화의 한 장면 같이 하버브리지에서 수많은 불꽃이 동시에 솟아올랐다.

불꽃놀이의 시작이었다.

하버를 따라 불꽃을 쏘아 올리는 포인트가 브리지를 기준으로 양쪽에 각각 네 곳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자리 잡은 Observatory Hill에서는 그중 다섯 군데의 불꽃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카운트다운을 외치던 사람들은 일제히 숙연해졌다.

누구도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앞의 장관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투영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지게 시작한 우리의 새해가 얼마나 멋질지 기대되었다.


카를로스 할아버지 부부와 우리 가족

카를로스 할아버지.

당신이 우리 가족에게 베풀어 주신 선의가 몇 곱절이 되어 다시 당신께 되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두 분 모두 백 살까지 건강하게 사시면서, 매년 이 자리에서 시드니 불꽃축제를 오래도록 함께 즐기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12월 31일마다 당신이 생각날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12월 31일이 되어, 그 자리에서 당신을 또 만나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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