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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im Jun 16. 2017

익명성의 세계


문득 집을 나서는데 나보다 한 걸음 앞서 걸어가는 소녀가 보였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인지 잠깐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걸어갔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모두가 눈이 마주치면 안녕, 하고 인사를 하지만 청소년들하고는 인사를 하기 어려웠다. 수줍어서인가, 인사를 해도 작게 "Hallo" 하며 눈을 피해버려서 나도 이제는 별로 시도하지 않는다. 소녀와 나는 나란히 기차역까지 걸어갔다. 이 아이와도 인사 한번 하기 어려웠다. 이 여자애는 불친절한 아이일까? 아니, 어쩌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는 애교쟁이일 수도. 그저  우린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웃음을 나누지도 않아서 내가 이렇게 오해할 수도.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는 익명성(anomity)이라는 단어가 돌아다녔다. 얼마 전 나의 나라에서 본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뉴스와 연결되어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큰 도시에 살면서 각자가 가진 영역은 제한되어버린다. 알 수 있는 사람도 한정되고, 처음 본 사람들을 쉽게 오해하기도 한다.


이렇게 넓은 세상에 모두를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면 서로를 오해하기가 더 쉽다. 왜 나를 보고 웃지 않냐며, 왜 나를 보며 먼저 인사하지 않냐며 오해하기 쉽다. 나 스스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 기준의 문화적 행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쉽게 비난한다. 그리고 그런 오해하는 사람들을 쉽게 비판해 버리기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큰 도시는 부작용이 너무 크다. 우리가 배출해내고도 해결하지 못하는 쓰레기 문제나, 끊임없는 환경오염물질 배출 문제, 아이들을 교육하는 문제 외에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와 증오가 심각하다. 늘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이웃의 목숨을 부질없이 끊어버릴 수 있을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기에 더 쉬운 일이었다 생각한다. 만약 그 사람의 가족사, 마음씨 따위의 것들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이 나의 인생과도 연결점이 생기고 손을 맞잡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린 모두 도시를 떠나야 하는 걸까.

그건 물론 가능하지 않다. 익명의 세계에서 공동체를 느끼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Leipzig 공원에 놓인 상자


친구와 Leipzig 구경을 간 날이었다. 친구는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곳 지리에 훤했고, 한동안 자신이 살던 지역 근처에 있는 공원에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부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상자라기보다는 부스였는데, 거기에는 옷가지나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누구나 필요한 사람은 가져갈 수 있고, 자신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 부스였다. 친구가 그 근처에 살 때 보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부스를 이용하는 걸 보았다고 한다. 자신의 물건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또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기도 하고. 라이프치히는 꽤 큰 도시였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이 망가뜨려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게 신기했다. 혹시 누군가 나쁜 맘을 품는다면 쉽게 더럽혀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건강하게 유지되었나 보다.


우리 마을에 놓인 책장

이 책장은 내가 지금 지내는 마을에 놓여있다. 책 수레는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읽은 책은 이 곳에 꽂아두고 읽고 싶은 책은 가져갈 수 있는 책장이다. 책장에는 책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친구 언니가 사는 뮌헨에서도 집 앞에 더 이상 읽지 않는 책이나 물건을 두는 상자를 본 적이 있었다. 물건의 주인은 만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은 방법 아닐까.


아마도 이런 방법들은 익명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지금껏 당면하는 문제들을 조금이나마 풀어갈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 공동체 안에 얇은 선이지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의 손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눈을 뜨게 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나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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