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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im Jan 10. 2020

기적이라는 인생, 삶이라는 기적.

12월 31일에 받은 선물

2020년이 시작된 지 한참은 된 것 같은데, 바로 지난주까지 2019년이었다는 게 아늑하게 느껴진다. 연말과 연초는 눈 깜짝할 새 없이 지나가버렸다. 나의 친구들이 12월 26일 날 유럽에서 한국으로 왔다. 다들 바쁜 일정을 쪼개서 오느라 며칠 지내지도 못했지만 멀리서 걱정해주는 것에 모자라 연말까지 함께 보내려 왔다는 게 고마웠다. 친구들이 도착하는 날 26일 새벽에 MRI를 다시 찍었다. 그리고 40% 정도는 마음을 놓고, 30% 정도는 기대하고, 또 30% 정도는 조마조마하며 판독 결과를 기다렸다.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나를 찾아와 준 친구들 셋 중 둘은 감기를 달고 유럽에서 건너왔고, 한국의 매서운 바람에 감기 기운이 더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번갈아가며 배앓이를 해대어 두 친구가 돌아가는 31일까지 쉴 틈 없이 친구들을 보살펴주었다. 처음엔 나를 위로하러 왔는데 미안하다고 하던 친구도 나중엔 포기하고 '내가 아파서 오히려 네가 아프다는 사실을 잊게 해 주려고 일부러 감기를 데리고 왔어'라고 말하며 웃어버렸다. 정말 친구들을 돌보느라 26일 찍은 사진을 깊게 걱정할 틈도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그렇게 31일 포르투갈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배웅하고 MRI 판독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다녀왔다. 결과는 '종양이 줄어들었고 종양 색깔도 옅어졌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은 결과에 어벙 벙한 마음이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해온 마음고생, 가족들의 걱정, 여러 생각들이 겹쳐왔고 무엇보다 내 옆에 있어준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외국에 있는 친구들과 나를 보러 와 준 S에게 소식을 전하니 새해 이브에 받은 가장 기쁜 소식이라고 함께 기뻐해 주었다. 


책 '하버드 의대는 알려주지 않는 건강법'에서 보면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의학적 믿음, 지식과 다르게 암이 감소할 때가 있다고 한다. 이번에 나를 방문한 친구들도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암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 나도 내 머리에 있는 종양이 작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들도 좋지 않은 종류의 종양처럼 보인다고 지난 몇 개월간 내게 인지시켜주었다. 그래서 2019년 12월 말의 목표는 종양 사이즈가 커지지 않는 것이었고, 만약 커지지 않는다면..이라는 가정하에 2020년의 계획을 세워두었다. 종양이 커지지 않는다면 1월에 독일에 가야지. 종양이 커지지 않는다면 결혼을 해야지. 모두 2019년 12월 31일에 확정될지도, 무산될지도 모르는 계획이었다. 


얼마 전 연기자 정일우 씨가 투병했던 사실을 고백했고,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당시 우울증이 찾아와 집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작년 8월 뇌종양 진단을 받았을 시기를 생각해 보았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상상보다 더 두렵다. 아니 두려울 수도 있지만 괴롭다. 서서히 우울에 잠식당하기도 하며,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내 옆에 쪼그려 앉아있는 느낌이다. 다가오는 죽음,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11월을 넘어서 종양이 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 스스로도 여러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다. 일단 내 앞에 닥친 10년은 꼭 살자. 그리고 잘 살아보자. 10년을 넘기면 그다음 10년, 20년, 30년을 기다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나이를 먹는다는 게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나도 30대가 되어보고 싶었고, 40대, 60,80,90... 쭈그렁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암이라는 아이를 마주치고 나서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너무나 괴롭고 힘든 순간이었지만 지나온 지금은 감사하고 단련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암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암도 내 몸의 일부분이지. 결국 이 아이도 나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온 걸 거야. 내가 정말 행복해지면 사라질지도 몰라.'라는 뚱딴지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2019년 12월 31일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나.. 오래 살 수도 있겠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삶에 대한 희망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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