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기억의 락페를 가다 <2019 WGT in Leipzig>
작년 이맘때 즈음 한창 들떠있었다.
락을 좋아하고 고스에 관심 많은 나의 친구 S와 그 남편(그때는 남자 친구)의 초대로 라이프치히의 WGT(Wave-Gotik-Treffen)를 계획했기 때문이다. 코스튬을 준비하고 이런저런 정보를 찾는 일은 지루한 나의 박사 일상에 활력이 되어 주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부터 고민을 했다.
'뭘 입고 가야 해?'
'그냥 검은색 옷 아무거나 입고 와도 괜찮아'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고스족을 길거리에서 본 기억은 있지만 내가 그 옷을 입는다는 상상은 한 적이 없었고, 언제 또 입을지 모를 코스튬에 돈을 써야 하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파티 때만 나오는 내 짠순이 본능. S가 내게 몇 년 전부터 WGT에 함께 가자고 초대했지만 늘 핑계를 대며 거절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상상 속에서 분장을 한 검은 아저씨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는 모습도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용기를 가지고 부딪히면 후회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정말 그랬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매년 치러지는 WGT는 정말 다양한 장르의 Dark music(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팬들이 찾는다. 방문하는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정말 다양하다. 고딕 락, 스팀펑크, 고딕 메탈, 사이버 고스, EBM, 인더스트리얼, 미디벌, 데스 락 등등 정말 다양한 장르를 사랑하는 음악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고스족들은 사회주의 당시 탄압을 받았던 세력이라고 들었다. 아마도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더욱 오해받았지 않았을까?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왜곡되었을지도 모른다. 통일이 되자 사람들은 라이프치히에서 드디어 WGT를 열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이념을 넘어서고 평화를 기념할 수 있는 기쁜 날이 되었다.
정말로 페스티벌 행사장 내에 들어와 있으면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각자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에 따라 다른 코스튬을 입고 있지만 서로를 존중한다. 가족끼리 코스튬을 맞추어 입고 오기도 하고 친구끼리, 연인끼리도 와서 쉬고 놀고먹고 그렇게 사흘간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는 정치적 이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일 년 내내 공들여 코스튬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데로 고치기도 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어떤 사람들은 노출이 너무 심해 다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는데 거기에 또 다른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분이 대놓고 그분의 뒷모습을 찍는 광경도 보게 되었다. 어디나 필터 안 되는 분들은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분위기는 밝고 즐겁다.
음악 페스티벌이니 물론 콘서트가 주를 이루지만 액세서리를 파는 부스나 이벤트도 도시 곳곳에 열린다. 이 기간에 라이프치히를 방문한다면 고스족들이 이렇게 도시를 누비고 다니는 걸 볼 수 있으니 축제에 참가하지 않아도 도시에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 눈이 즐겁다.
'우리는 정성스럽게 코스튬을 준비하고 입었으니 물어만 주신다면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한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한 코스튬을 뽐내며 거리를 다니는 모습은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물론 선급한 판단은 금물이고 허락 없이 사진 찍는 일도 없어야 하지만.
메인 행사장 안으로 들어오면 더 큰 쇼핑 공간이 펼쳐진다. 음반, 타투, 인형, 옷, 액세서리 없는 게 없다.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WGT에는 음악, 쇼핑 외에도 박물관, 패션쇼, 강의, 늦은 밤 클럽까지 열린다. 정말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3일권을 끊는 사람들은 3일 내내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특별히 흥미로웠던 프로그램 중 하나는 고스 음악과 여성 관계에 관한 강의였다. 현직 여성 DJ와 작가분이 나와서 강의를 이끌었던 걸로 기억한다. 많은 청중들이 고스 음악에서 여성이 타자화되는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기도 했고 여성으로서 어떤 음악을 만들고 어떻게 음악을 해석할 수 있을지를 토론했다. 많은 음악 장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인더스트리얼 뮤직, 메탈, EBM 등에서 특별히 자주 등장하는 여성의 타자화, 남성의 주류화는 여성 팬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확실했다. 나도 EBM 콘서트를 즐겁게 참여했지만 같은 밴드 멤버인 것 같은데 여성은 백댄서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아서 '이게 꽃 역할인 건가'라는 생각이 음악을 듣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강의와 토론이 음악 축제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내겐 큰 의미로 다가왔고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음악 축제에서 여러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들어볼 수 없었던 장르도 많았다. 나의 부모님이라면 '이런 음악은 듣는 거 아냐!'라고 말할 것만 같은, 어떤 사람들은 '이건 무서워서 싫어'라고 단언해버리고 말아 버릴 그런 음악도 친구를 따라가서 듣고 왔다. 그리고 다 듣고 나서 '음 이건 생각보다 좋은데?' 혹은, ‘이건 정말 내 취향이 아니네'라고 결정했다. 내 취향은 스팀펑크 쪽이었고 EBM도 즐기기에는 좋았지만 시각적으로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In extremo는 명성만큼이나 듣기에도 좋았고 Coppelius는 처음 들은 스팀펑크 밴드가 나를 빠져들게 했다. 한국에 와서도 종종 들었다. 헤비메탈은 과연 내 취향이 되지 못했다.
콘서트에 온 사람들도 각양각색이었다. 아쉽게도 한국인은커녕 아시안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백인이었지만 다양한 성적 지향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가 많고 어림, 누구와 함께 있고 무엇을 입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음악을 즐기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기 위해 축제 마지막 전날 친구들과 WGT 측에서 열어준 클럽에 참가했는데 장르별로 장소가 달랐다. 나는 S의 친구를 따라 사이버 음악에 따라갔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대부분이 자신의 춤사위에 도취되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춤도 아래 링크의 춤을 모두가 추고 있었다! (이 춤은 EBM 콘서트에 가도 볼 수 있다) 아 너무 재밌었다!! 마치.. 내가 초등학교 때 캠프파이어에 온 느낌이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를 건드리지도 않고 정말 열심히 춤추고 있노라니 너무 대견스러워서 뭐라 형용할 수 없다. S의 친구도 열심히 춤을 추더니 2시가 넘지 않은 시간에 우린 모두 너무 피곤해져서 집으로 귀가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PbVRpRgHso
허기진 배는 보통 축제 행사장 안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사 먹었지만 여기도 추천한다. 메뉴를 보면 알겠지만 외식인데 저렴하다. 심지어 라이프치히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S도 학생 때 가끔 왔던 곳이라 했다. 물론 채식 메뉴도 있다. 나머지는 더운 날씨에 계속 음료를 사 마시고, 행사장 내에서 푸드트럭을 이용하고 가끔씩 피자를 먹었다. 아침은 S의 친구 집에서 지내느라 유일하게 건강하게 먹었다.
행사장 내에서는 음료를 사면 pfand 비용으로 2유로를 추가로 내야 했는데 컵을 돌려주면 다시 2유로를 돌려받는 식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컵을 버리지 않고 다시 가게에 돌려주었고, 가게는 컵을 씻어서 다음 손님에게 제공했다. 이는 독일 내 축제에서는 대부분 이뤄지고 있는 시스템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다.
WGT를 사랑하는 S와 S의 남자 친구는 벌써 이곳에 5번 넘게 참가했다.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을 나온 S에게는 WGT을 준비하지 않는 봄은, WGT 없는 여름은 진짜 봄이 아니고 진짜 여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일 것 같다. 심지어 이번 여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출도 자제되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어두운 여름이 되어갈 것만 같은데, 그나마 집에서 듣는 음악과 따스한 햇빛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길 바란다.
축제를 잃어버린 것 같은 여름이지만 음악은 잃어버리지 말고 내년까지 잘 지키고 다시 모이면 두 배로 즐거울 거다. 우리가 다시 축제를 찾을 수 있기를. 그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