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편식쟁이 선생님입니다. 성인이 된 후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가리는 음식이 많습니다. 향이 강하거나 식감이 물컹한 음식은 아직도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옆 반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가끔 저를 놀려댑니다.
-선생님, 오늘 순댓국 나온대요. 맛있게 드세요!
향이 강한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는 저에게 순댓국은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급식실에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특유의 고기 향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냅니다. 밥을 먹기는커녕 태연한 척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문이 따로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급식 지도를 해야 합니다. 아이들보다 편식이 심한 선생님도 예외는 없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절대 음식을 다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입은 먹어보고 버리는 게 식사를 만들어 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밥을 잘 먹은 아이에게는 아낌없는 칭찬을 퍼부어주지요.
급식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동탯국입니다. 선생님이라고 급식 아주머니들께서 제 속도 모른 채 건더기를 가득 담아주셨습니다. 흐물거리는 동태의 껍질과 설겅이는 무의 식감을 좋아하지 않아 저는 국물만 호로록 떠먹습니다. 어린이 입맛에 맞춘 떡갈비만 조금씩 떼어먹습니다.
그때 제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태린이가 벽에 붙어있는 뭔가를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잔반통 앞에 문구가 붙어있는 문구가 보입니다.
버려진 음식만큼 내 품격도 버려집니다
선생님 눈동자가 흔들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20년간 다져진 연기력을 발휘할 시간입니다. 주위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어봅니다.
-좋은 말이네. 우리 품격을 지키기 위해 맛있게 먹어보자.
말을 내뱉고 최선을 다해 선생님도 맛있게 먹는 '척' 해 보입니다. 2학기,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자리를 뜨는 건 선생님이니 저는 비밀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저희 반 아이들이 밥을 빨리 먹고 자리를 비우는 게 오늘처럼 기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앉아있는 아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선생님을 빤히 쳐다봅니다.
평상시 5분이면 밥을 먹고 자리를 뜨는 아이가 갑자기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까지 싹 비워버립니다. 그리고 아직 절반도 채 비우지 못한 선생님의 식판을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태린아, 왜 안 가? 다 먹었으면 교실 가서 친구들 도와줘야지.
-아니, 괜찮아요. 오늘은 선생님 기다릴게요.
아! 이런, 눈치 빠른 아이는 꿋꿋이 자리를 지킵니다. 결국 선생님의 권위를 비겁하게 활용합니다. "빨리 가. 1학년 동생들 들어오잖아. 삼! 이! 일!" 아이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 특유의 웃음을 보이며 제 귓가에 한 문장을 속삭입니다.
-선생님, 버려진 음식만큼 내 품격도 버려진대요.
이 자식이 제가 매번 음식을 엄청 버리는 걸 알고 저를 놀려대기 시작하네요.
오늘은 저를 위해 알림장 한 꼭지를 남겨야겠습니다. 음식을 가리는 마흔이 훌쩍 넘은 어린이 입맛 선생님을 위해서요.
2025년 10월 24일 알림장
스물둘. 버려지는 음식만큼 내 품격도 버려집니다.
글귀를 보고 아이들이 웅성거립니다. 누군가는 뭔가 오늘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며, 누군가는 가슴이 콕콕 찔린다며 서로를 돌아봅니다. 저 멀리 교실 뒷자리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태린이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골고루 밥 잘 먹는 선생님 연기가 이제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면서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아졌습니다. 한 입 먹어보니 선입견에 가로막혀 안 먹었던 게 더 많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저희 반 편식쟁이 아이들도 한 입씩 먹다 보면 점차 나아지겠지요. 아이들에게 권하는 것처럼 저도 제자신에게 꾸준히 권해 보아야겠습니다.
하교시간, "안녕히 계세요"라고 꾸벅 인사를 마친 태린이가 문을 나서다 말고, 가늘게 뜬 눈으로 저를 보고 씩 웃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버려진 음식만큼 내 품격도 버려진대요."라고 또 한 번 쐐기를 박습니다.
아, 정말 저 주둥이를 어떻게 해야겠네요.
막으려면 내일은 남김없이 먹어봐야겠지요?
그런데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