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선물을 가져옵니다. 학기 초 아이들에게 선생님 취향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 말려'의 맹구를 좋아한다고. 아이들은 왜 선생님이 주인공보다 맹구를 더 좋아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선생님은 왜 맹구를 좋아하세요?
-맹구는 생각이 깊어. 항상 행동하기 전에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예쁘거든.
이후, 선생님 이야기를 기억한 아이들은 클레이로 만든 맹구 얼굴, 맹구의 명언이 들어간 책갈피, 맹구의 사랑고백을 넣은 자신의 그림 한 컷 등 정성껏 직접 만든 작은 마음을 전해줍니다. 마음을 담은 선물이 모여 선생님 책상 위는 어느덧 맹구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오늘 아이 하나가 등교하자마자 선생님께 쭈뼛거리며 다가옵니다. 자기 손보다 조금 작은 반지 상자를 선생님 책상 위에 살며시 올려둡니다. 아이는 평소 말을 붙이기 전까지는 먼저 말을 하지 않는 아이입니다. 오늘도 반지 상자를 올려둔 후 아무 말 없이 선생님 반응을 기다립니다.
이건 분명 선생님을 향한 마음이겠지요? "선생님 선물이야?"라고 물어보니 아이는 보일락 말락 수줍게 고개만 끄덕입니다. 상자 뚜껑을 열어봅니다. 새끼손가락 절반 크기의 작은 도장이 들어있습니다. 도장을 들어보니 직접 칼로 조각한 하트모양이 지우개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내 어린 학생의 마음에 선생님 가슴도 콩닥거립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이거 직접 만든 거야?"라고 물어봅니다. 아이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조심스레 "네"라고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상자 구석에는 맹구 스티커도 붙어있었네요.
이 아이는 평상시 저에게 거의 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일이 생길 때만 말을 건네고, 답을 듣고 나면 곧장 자리로 돌아가지요. 선생님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저 또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편이었습니다.
이런 아이가 건네는 마음이라니. 선생님 입가에 웃음이 스며듭니다. 고맙다는 말로 선생님 마음을 전하기 부족해,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아이를 꼭 안아줍니다. 제 품에 들어온 아이의 체온이 이 세상 무엇보다 따뜻합니다. 고마움의 마음이 나의 체온으로 아이에게 전해지길 바라봅니다.
그때 자기들끼리 바닥에 앉아 놀던 누군가 이 광경을 보고 본인도 안아달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선생님이 널 왜 안아주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는 표현법은 누구나 다른 법이지요. 오늘 알림장은 마음 표현에 대한 다른 관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기에,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의 관점에서 지켜봐 주는 것을 배워야겠지요.
2025년 10월 27일 알림장
스물셋.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____________을 해 줍니다.
뜬금없는 질문에 아이들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듭니다.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먼저 답 해 봅니다. 선생님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말로 사랑한다 이야기하고, 꼭 안아주는 걸 좋아한다고. 다만 신체접촉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1학기 어린이날 악수 선물처럼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해 준다고.
아이들은 맹구처럼 묵묵히 생각에 잠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지? 각자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려 봅니다.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친구를, 누군가는 이성친구를.
알림장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이야기를 한 명, 한 명 들어봅니다.
-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 줘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은근슬쩍 더 챙겨줘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고 안부를 물어요.
-저는 누군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더 집중해서 들어줘요.
26명의 아이들이 있는 공간은 26개의 생각이 함께 공존합니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똑같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른 법이지요.
아이들 중 '단짝'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경우가 종종 보입니다. 특히 이 맘 때 사춘기 여자 아이들은 무리를 형성해 '단짝' 친구를 만들어 갑니다. 성장의 한 과정이지만, 때론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단짝 친구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내가 이만큼 좋아하고 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는데, 상대가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오해하고 속상해합니다. 그러고는 절교를 선언하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원수 같은 사이로 돌변하지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내 마음과 똑같을 순 없습니다. 나의 좋은 의도가 누군가에게는 글자 그대로 전달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알았으면 합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표현법이 존재하지요. 서로의 마음을 읽어주고 나와의 다름을 인정해 주는 것, 이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아이들이 어른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잘 내딛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