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시간입니다. 5학년 판본체에 이어, 6학년에서는 궁체가 등장합니다. 아이들은 물붓을 이용해 물붓용 연습판에 각자 궁체 쓰기에 매진합니다. 물이 마르면 흔적이 사라지기에, 몇 번이고 반복해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을 이어갑니다. 자신의 글씨에 집중합니다.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아 써 내려갑니다. 누군가는 연필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며 불만 어린 투정을 부리면서도 신중하게 글자에 정성을 담아봅니다.
30분 같은 60분이 흐르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집중했던 미술 시간이 끝이 납니다. 이제 자신의 물건을 정리할 시간입니다. 각자 물붓과 연습판을 정리합니다. 연습판은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아 원상태로 되돌려둬야 합니다.
2학기 임원들이 선생님을 도와 물품 정리를 함께 합니다. 회장 아이가 연습판을 수거하고, 부회장 아이가 물붓을 차곡차곡 정리합니다. 그때 회장에게 연습판을 건네주던 한 아이가 갑자기 언성이 높이며 쏘아댑니다.
-어우! 나 너 안 사랑해! 이거 선생님한테 쓴 거야!
선생님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봅니다. 선생님이 연습판을 걷을 줄 알았던 아이는 연습판 구석구석에 '사랑해요'를 궁서체로 써 두었습니다. 여자 아이가 회장 남자 아이에게 연습판을 건네주며 이거 너한테 한 거 아니라고 진저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몇몇 아이들도 똑같은 반응을 보여줍니다.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또박또박 쓴 연습판을 회장에게 건네며 "이거 너 아냐!"라고 손사래를 치며 외쳐댑니다.
회장 아이도 참을 만큼 참았는지 평상시 잘 들어보지 못한 짜증 섞인 소리로 결국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나도 알아! 안다고! 나도 안 사랑해.
'사랑해'라는 표현이 열세 살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누군가를 위한 한정된 표현인가 봅니다. 그렇게 누군가 날카롭게 쏘아 올린 말 한마디가 교실을 돌고 돌아 결국 오늘은 사랑 없는 반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제가 올해 아이들에게 배운 것 중 하나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담으로 시작한 마음 표현도 100일간 끊임없이 듣게 되니 정말 들은 대로 마음이 바뀌어 갔습니다. 그래서 2학기에는 아이들에게 받은 마음을 그대로 돌려주려 하는 중입니다. 마음으로 삼키지 않고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다양한 방식으로 선생님 마음을 들려줍니다.
사랑이라는 건 꼭 남녀 간의 사랑만을 뜻하지는 않겠지요. 내 주변 마음을 건넬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걸 아이들은 아직 이해하기 어렵나 봅니다.
오늘은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다는 걸 아이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어, 알림장 한 꼭지를 채워봅니다.
2025년 10월 20일 알림장
스물.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먼저 선생님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를 들려줍니다. 사실 저는 감정 표현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사랑해', '좋아해'란 말을 잘하지 않는 편이지요. 대신 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일상을 챙겨주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수시로 묻는 말이 있습니다.
"00아, 어제 일찍 잤어?"
"00아, 오늘은 아침 먹고 왔어?"
"00아, 오늘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이런 말들이 사실 선생님의 사랑 표현의 다른 방법이라고 알려줍니다. 이 질문은 선생님이 너희들을 사랑하고 있기에 너희의 일상을 챙겨주고 싶어 나오는 '사랑해'의 다른 표현 방법이라고. 유독 이 질문을 자주 받았던 아이들은 '그랬던 건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선생님 말에 힌트를 얻은 아이들도 자신만의 사랑을 정의 내려봅니다.
누군가는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는 은근슬쩍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는 함께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는 상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는 얼굴을 보고 좀 더 웃어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랑'은 상대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네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남녀 간의 사랑이 가장 먼저 떠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훨씬 더 넓고 깊은 종류의 사랑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좀 더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서로의 마음에 싹을 틔어, 함께 나누고 행복할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이 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