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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나는 ____해서 행복합니다

by 콩나물시루 선생님

10일간의 긴 연휴가 끝났습니다. 열흘 만에 문을 연 교실은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잠에 빠진 교실을 깨우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줍니다. 창문 너머로 연휴 기간 내내 내린 비가 계속 이어집니다. 타닥타닥 내리는 빗소리와 빗방울을 머금은 흙냄새가 교실에 남아있던 잠기운을 몰아냅니다.


8시 30분이 되자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로 들어섭니다. 추석 연휴를 잘 보냈는데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아이부터 아직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비적비적 걸어 들어오는 아이까지. 교실은 아이들로 금세 가득 채워집니다.


방학이나 긴 연휴를 마치고 오면 아이들도 선생님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동네에 놀 친구가 없어 학교에 오고 싶었다는 아이도 있지만, 6학년쯤 되니 대부분의 아이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연휴가 못내 아쉬워집니다.


선생님도 잠기운을 떨쳐내지 못해 연신 비어져 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참아봅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긍정적인 말만 하려고 하는데 오늘은 저도 모르게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아이고, 오늘 선생님 피곤해 죽겠다.



평상시 잘 듣지 못했던 선생님 말투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칩니다. 선생님이 한 마디 하면 서너 마디 더 붙이는 게 습관이 된 아이들은 이럴 때면 졸릴 것도 잊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댑니다.



-선생님! 죽으면 안 돼요! 오래 살아야 해요!


-싫어, 선생님 이제 늙어서 힘들어. 선생님은 적당히 살 만큼만 살다 갈 거야.



농담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며 선생님 말에 하나, 둘 계속 토를 답니다. 그때 아이 하나와 눈이 마주칩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선생님을 애처롭게 쳐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긴 연휴 끝자락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한 자락이 누군가에게는 무겁게 느껴졌을까요? 아이가 보내온 눈길에 그제야 선생님 정신이 번쩍 돌아옵니다. 사석에서 농담처럼 친구 사이에나 할 법한 말이었다는 것을요.


멋쩍고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알림장을 적어봅니다. 오늘 알림장은 아이들이 아닌 저를 위한 한 문장입니다.



2025년 10월 13일 알림장

열여덟. 내가 오늘 행복한 이유
-나는 _______해서 행복합니다.



인간의 뇌는 근육과 같습니다. 내가 한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면 뇌는 그 방향으로 향하는 길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합니다. 힘들고 피곤한 생각은 나의 하루를 지치게 만듭니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발견해보고자 하는 노력은 나의 하루를 생각한 대로 이끌어가는 힘이 되어 줍니다.


매일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오늘은 제가 잊었네요. 미안한 마음에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마음을 들려줍니다.



-얘들아, 오늘 선생님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건 너희들이 내가 만난 6학년 아이들 중에 제일 사랑스럽다는 거야. 난 2025년에 너희들을 만날 수 있어 정말 행복해.



누군가는 선생님 말을 듣고 배시시 웃어줍니다. 누군가는 '내년에는 2026년의 아이들이 제일 예쁘다고 하실 거지요?'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던져 보입니다.


저의 말이 어쩌면 아이의 말처럼 입바른 소리라 치부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요?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농담처럼 느껴지는 입바른 소리라도 매일 에너지를 담아 누군가에게 전하게 되면, 그 말은 곧 사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내일이라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아이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루에 하나씩 정말 사소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순간을 찾을 수 있는 아이들이 되길 바라봅니다. 그러기 위해 저부터도 아이들과 함께 노력해 보아야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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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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