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중학교 1학년 때, 음악에 빠지기 시작했고 20대 무렵엔 헤비메탈과 록음악 그리고 가요와 팝송까지 그야말로 음악 듣기의 ‘무식한 축적기’를 보냈어. 근데 그건 내가 ‘음악을 열심히 들어야겠어.’라고 마음먹고 들은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음악을 듣는 줄 알았지. 숨 쉬고 밥 먹는 것처럼 그냥 항상 하는 거... 음악.
근데 실은 그렇지는 않더라고. 그림을 모든 사람이 잘 알지는 않고 운동을 누구나 다 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야. 클래식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내가 좀 외골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 예를 들어서, 내 차는 일단 타면 클래식 FM이 늘 나오는데 그걸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서 누군가 내 차를 타게 되면 난 볼륨을 줄이곤 해. 내가 좋다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게 별로여서 그렇게 하는 것 같아. 그러다 나처럼 차에서 항상 클래식 FM을 듣는 사람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운지..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이겠지.
음악을 듣는 감각에 대해서 전에 J가 카톡으로 말했었잖아. 나도 가끔 생각했거든. 난 음악을 듣는다기 보다는 느낀다고 말이야. 클래식을 많이 듣긴 하지만, 모든 장르를 다 좋아하는 것도, 모든 악기연주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어찌 보면 듣는 것만 돌려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음악이 좋고 싫고에 대해서는 뚜렷한 설명이 잘 되진 않아. 그저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온몸의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가진 오감 말고 다른 차원의 어떤 감각을 통해서 나한테 흡수되는 느낌이 들어. 음악이 내게 쏟아지는 느낌이랄까.
10여 년 전, 경기도 안양에 살 때 아이들은 어리고 해야 할 일만 그득하게 쌓여있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나를 잃어간다고 느낄 무렵에 음악회에 가기 시작했어. 우연히 가까운 공연장에서 '브런치 음악회'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오전 11시에 하는 공연이라니... 만 오천 원 티켓을 사고 음악회 당일에 그곳에 가면 큼직한 머핀과 아메리카노를 한잔씩 나눠주었어. 아이들 학교, 유치원 보내고 공연장에 도착하려면 아침은 대충 먹거나 못 먹고 나온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이들을 위한 배려였지. 두 손에 머핀과 커피를 들고 함께 온 친구 몇과 행복한 수다를 떨다 공연장에 들어가던 그 기분이란. 육아의 힘듦도, 자신의 이름을 잃어가는 주부로서의 삶도 그 작은 배려로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면 너무 오버일까? 근데 그건 사실이었어.
그렇게 공연장에 입장하면 그 달의 주제에 맞는 음악을 듣게 되는데 굉장히 고품격의 공연이었어. 특히 실력은 물론이고 훈남이기까지 한 피아니스트 김정원 님과 내가 가장 애정하는 뮤지컬 배우인 최정원 님의 공연이 정말 인상적이었어. 특히 최정원 님의 나지막하면서도 파워풀하고 다정한 음색은 단연코 최고였지. 어린 시절 최정워 님은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했다고 해. 근데 그분의 어머니가... 그렇지 않다고, '네가 얼마나 예쁘고 개성 있는 줄 아느냐' 하시면서 방에 큰 거울을 달아주셨다고 해. 그 거울을 보면서 우리의 최정원 배우님은 춤도 추고 다양한 표정도 지어 보이면서 놀았다고 하셨어. 그런 시간들이 훗날 뮤지컬 디바가 될 초석을 다진 소중한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눈물짓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선율로 감동하면서 나도, 함께 간 친구들도 그날만은 누구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대우받는다는 기분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음악이라는 것이 단지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 예술의 전당이나 국립극장처럼 큰 공연장이 아닌 신도시의 아담한 콘서트홀이었는데도 직접 연주되는 걸 듣는 음악은 귀가 아닌 마음을 두드렸던 것 같아. 무대 위에서 악기가 연주되거나 노래를 하면 그 소리는 비 오는 날 커피 향이 아래로 퍼지듯 무대 아래로 쫘악 퍼지지. 그러고 나서 그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속 깊은 곳의 심연을 두드리고 온몸으로 흡수되는 거야. 영혼을 두드리리는 소리가 되어서.. 음악이란 건 그런 거야.
그 이후로 난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을 내 마음을 두드리는지 아닌지로 감별하게 되었어. 내 마음과 몸을 통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음악은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고 그런 식으로 내게 다가오는 음악을 많이 작곡한 작곡가를 좋아하게 되고 열혈팬이 되는 거야. 베토벤처럼.. 반면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곡도 내 안으로 흡수가 안 되면 내게서 겉돌다가 금세 잊히곤 하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 그게 음악이지 않을까. 음악은 형태가 없잖아. 음악이 존재한다는 건... 과연 공기 중의 진동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베토벤이 작곡한 곡을 베토벤 자신이 연주할 때와 백건우가 연주할 때 그 곡은 과연 같은 곡일까. 음악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음반 안에? 클래식 방송 안에? 내 머릿속에? 아니면 가슴속에? 기억 속에? 이런 생각에 빠져있다 보면 솔직히 ‘내가 좀 이상한가?’라는 생각도 들긴 해. 음악에 빠져서 이러고 있다 보면 가끔 외로워지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별로 없거든. 그러니 J가 클래식을 알려달라 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겠어? ㅎ
난 음악 전공자도 아니고 피아노를 계속 치긴 하지만 실력도 변변치 않아. 아니, 비루한 쪽에 가깝지. 겸손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음악가나 음악 자체에 대해서도 실은 많이 아는 게 아닐 수도 있어. 근데 내가 음악을 느끼는 것, 음악이 내게 쏟아질 때 내가 얼마나 엄청난 걸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밤새도록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 아마 J도 내게서 그런 ‘특이함’을 읽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고맙고. 그건 나를 알아주는 것이니까. 나를 알아주는 한사람을 위해서 난 매일 심사숙고 끝에 곡 하나를 골라. 좋은 음악으로 나를 알아준 데 대한 보답을 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