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시간... 남편은 외출했다 저녁을 먹고 왔고, 돌아오면서 성게 미역국을 사 와서 오랜만에 깊은 맛이 나는 성게 국물로 배를 채우고 나니 느긋한 밤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읽고 있던 김애란의 소설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얼마간 읽다가 쿠션들을 거실 바닥 러그 위에 내려놓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 몇 권을 늘어놓고 앉았다 누웠다 다시 고쳐 눕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책을 읽었다. 얼마만인가. 이런 평화로운 시간이.
추석 연휴가 시작되고 전쟁 같은 시간이 다가왔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나는 건 너무 좋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몸무게가 6킬로 가까이 되는 고령(12살, 사람나이로 환산하면 80세 정도)의 개님 루피를 데리고(아니, 모시고) 비행기를 탄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아이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이다.
루피를 데리고 다니면 육지여행의 소소한 재미인 면세점 구경도, 돌아올 때 들르는 롯데몰도 다 남의 이야기이다. 최소한으로 꾸려도 비실한 몸의 소유자인 내겐 이미 한도 초과의 무게인 짐을 가지고 루피와 남편과 육지로 가서 추석을 지내고 왔다. 평소엔 2박 3일로 가는데 이번엔 하루 일찍 가서 친구도 오랜만에 만나서 좋긴 했는데 그 일정이 너무 무리였던 것 같다. 안양 시가에서 1박, 의정부 친정에서 1박 후, 친정 식구들과 5월에 입대한 아들 면회를 다녀왔다. 철밍(가명)이는 전보다 더 까매졌고 어깨가 더 넓어졌고 안경너머 눈은 더 서글서글해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PX에서 티셔츠와 달팽이크림 등 (외할아버지 선물은 무려 양주..) 10명이나 되는 가족들의 선물을 챙겨 와서 나눠주는 모습을 보는데 마음 한쪽이 시큰했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어쩜 저렇게 멋있을까. 우리 아들... 내가 낳았지만,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멋진 어른으로 내 앞에 있던 철밍이...
크지 않은 부대의 좁디좁은 면회실에서 아들과 꿈같은 세 시간을 보내고 다시 개님과 함께 집으로 오는 길은 역시 험난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음날 오후 학원 출근을 하고 그다음 날부터 나는 앓아누웠다. 그야말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끙끙 앓았다. 몸이 아프면 마음까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곤 한다. 3일간 그렇게 누워 있으면서 그간 힘들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머리와 마음속을 온통 점령해 버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건지,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아픈 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아팠던 건, 단지 '추석에 벅찬 일정을 소화해야 해서'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실은 요즘의 나, 최근의 나는 대체로 많이 힘들었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그건 타인과의 '관계'의 문제일 수도, 나 자신의 찌질함을 참을 수 없는 데도 오는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갱년기의 호르몬일 수도. 호르몬 핑계를 대면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안히지기도 한다. 여하튼 나는 지쳐 있었고 누군가가 너무 미워지곤 했는데 그게 지속되다 보면 결국은 나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음악도 제대로 듣질 못했던 것 같다. 그저 클래식 FM을 틀어놓는 것만이 나의 음악 행위의 전부였다.
근데 희한하게도, 일요일 저녁에는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만들고 싶었다. 초록색 러그 위에서 이리 뒤척이며 저리 뒤척이며 아무 급할 일 없이 느긋하게 책을 읽을 때, 나는 아주 오랜만에 라디오가 아닌 내가 직접 공들여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플레이리스트는 예전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듣는 음악만 주구장창 듣는 습관이 있다. 마트에 가도 새로운 걸 사는 일이 거의 없고 거의 같은 식재료를 사 오는 스타일인 나. 그렇게 재미없는 나이지만, 그래서 하나에 정을 쏟기 시작하면 그게 아주 오래간다. 음식도 음악도. 그리고 사람도.
플레이리스트는 주로 클래식과 클래식이 아닌 음악으로 나뉜다.클래식은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주로 듣는다. 멜론에 비해 다양한 음악가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기 때문이다. 클래식이 아닌 음악들은 가요, 팝송, 연주곡등이다. 이번 주말에 들었던 음악들은 클래식이 아닌 음악을 멜론에서 다운로드한 것들이다.
매번 들어도 좋은 음악들. 늘 내 곁에 있는 음악들을 들으며 김애란의 소설과 김신회의 에세이를 번갈아가며 읽었다. 일부러 고른 것도 아닌데 두 책 모두에 내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다.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언제든 꼭 나에게로 오게 되다고 했던가. 내가 고른 책과 내가 고른 플레이리스트 덕에 더없이 안온한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9월 어느 주말, 거실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으며 들은 플레이리스트
1. 인스타그램, 딘
2. 사랑하긴 했었나요, 잔나비
3. 가을 우체국 앞에서, 김대명
4.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잔나비
5. Our last summer, 영화 맘마미아 ost
6. Come together, Beatles
7. Still with you, 정국
8. Bostro Fada,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ost
9. 너에게, 윤상
10.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신해철
11. 조커, 서동현
12. 재즈카페, 신해철
12. 신청곡, 이소라 (feat. 슈가)
13. 우산, 윤하
14. 사랑했나 봐, 윤도현
15. 황혼, 코타로 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