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초대

버티기

by 이윤경

깜빡 졸았다. 벨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또 시작이다.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친정아버지와 남편의 연이은 부도로 빚쟁이들 관심이 나에게 쏠린 다음부터 생긴 경기 같은 증상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벨이 울리고, 집을 찾아와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때문에 작은 인기척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피신한 친정 부모님과 남편을 찾겠다고 미행도 당하다 보니 주변을 자꾸 살피는 버릇도 생겼다. 그동안 네가 너무 편하게 살았지, 철딱서니가 없어! 마치 일부러 본때를 보여주려는 듯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이때부터 강제이기도, 자발적이기도 한 고립 생활이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두 남자는 해외 출장 중이라고 말했고 개인 사정은 티 내지 않았다. 빛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을 아이 하나만 꽉 안은 채 혼자 버티려 애쓴 나날들이었다.

아이를 재우느라 옆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었나 보다. 얼른 전화기를 들었다. 새근 자는 아이를 확인하고 토닥이며 깨지나 않을지 눈은 아이 표정에 가 있었다. 놀러 가자는 들뜬 목소리가 귀로 흘러든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고 비슷한 나이의 아이가 있고 비슷한 남편도 있을 거로 생각한 지인들이 지겨워 죽겠다며 놀러 가잔다. 애는 부모님 찬스 쓰자며 육아의 답답함을 토로했다. 남편들과 부부 동반으로 캠핑이다 뭐다 몇 번 어울리긴 했지만, 여자들끼리 따로 만날 사이는 아니었다. 친한 것도 아닌데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짜증도 났다. 팔자 좋은 소리를 들을 마음이 없어 차갑게 나가고 싶지 않다 한마디를 하고는 끊어버렸다. 졸지에 온통 걱정뿐인 두 집의 가장이 되어 언제든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추스르기도 버거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저렇게 팔자 좋은 여자였는데.

"00 씨, 센스가 참 돋보여요."
우리 집에 모인 날 그들은 칭송했다. 파란색 화장실 미니 의자가 너무 예쁘다고, 아이 뾱뾱이 그림책이 신기하다고, 직접 만든 부엌 식탁이 독특하다고, 집이 너무 좋다고... 하루아침에 코딱지만 한 월셋집에 아이와 나만 내동댕이쳐진 상황이 나도 당황스러운데 저들에게 뭐라 말할 수 있을까. 꼴 같지 않은 생활용품에까지 빨간색 압류 딱지가 붙어 있는 이 꼴이 나도 남의 일 같은데 저들이 어떻게 이해를 해줄까. 온통 금 모으기 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하자며 의지를 다지는데 금을 팔아 생활비를 써야 하는 내 마음을 저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무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그때는 그저 버텼다. 아이가 있었으니까. 이 아이는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천덕꾸러기로 구박을 받는 장면이, 배가 고파도 눈치를 보며 울지 못하는 아이가, 매를 맞고 고함을 듣는 거지 같은 꼬락서니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절대 내 아이를 그렇게 만들 순 없었다. 딱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밥 벌어먹고살 때까지만 버티자 했다. 그렇게 아이가 나를 버티게 했다.

가장 공평한 문제의 해결 방법 중 하나가 시간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시간은 고통스러웠지만 우리 부부는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견딤으로 얼마간 마음의 여유를 얻은 지금이다. 얼마 전 남편은 그때 이야기를 물었다.
놀러 가자고 전화를 했었다며? 당신은 왜 안 나갔어? 당신이 말을 안 해서 몰랐네. 오늘 다 만났는데 그날 당신만 빼고 다 가자고 약속이 됐었나 봐. 그냥 커피나 마실 것이지 클럽을 가서 거기서 만난 남자들하고 놀았다네. 계속 만나는 걸 들켜서 난리도 아니었나 봐. 남편 얼굴에 뿌듯함이 묻어 나온다. 다 당신 덕이라고, 당신이 자리를 잘 지켜줬다고, 현명한 여자로 칭찬이 자자했다고 고맙다고 했다.

현명해서가 아니었다. 깊은 동굴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때 나는 누가 힘듦 좀 알아줬으면, 누가 두려움 좀 봐줬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숨겨진 나의 진짜 얼굴을 보고 안아 주기를 너무나도 원했었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누구라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바라고 또 바랐었다. 그런 내가 만약에 나갔다가, 가식적이더라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누군가를 만났더라면, 힘든 마음을 보듬어 안아 주며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면 과연 나는 흔들리지 않았을까. 그녀들도 처음부터 남자를 만날 목적으로 작정하고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 전화 한 통으로 모였던 여자들 인생도 어쩌면 나만큼이나 어떤 이유에서건 흔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유혹은 상대방이 아니라 스스로 흔들리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안 나가길 참 잘했다는 남편 말에 웃으며 나는 농지거리를 던진다. 그때 내가 나갔으면 그 여자가 아니라 내가 바람이 났을걸!

힘들 때 나는 나를 가두고 살면서 그것이 내 성격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잘 버텼을 수도 있다. 즐기는 방법으로 그 시절을 넘기려 했었더라면 유혹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고립되어 살았던 것이 지나고 보니 나았던 것도 같다. 수많은 꽃잎으로 한 송이 꽃을 피운 만홍이 사람 인생 같다. 지나온 시간이 겹겹이 쌓여 온전한 형체를 만드는 걸 보며 나도 온전한 모습의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