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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고래 May 02. 2024

월간두부 "견주의 우울에 대하여"

‘육아번아웃’처럼 시작된 ‘반려견 입양우울증’

월간두부 4월호


-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하거나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가?

- 평소 하던 일에 흥미가 없어지거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가?

- 피곤하고 기운이 없는가?

 이 질문들은 PHQ-9의 우울증 자가진단 척도이다. 9개의 문항 척도에 체크를 하고 각 문항의 점수를 더하였을 때 점수별로 우울증이 아닌지, 그 우울증의 정도가 가벼운 지 무거운지 알아보는 검사이다. 4월 한 달간은 9점 내외였다. 가벼운 혹은 중간정도 우울증이다. 10점 이상은 전문의와의 상담이 필요하다고 안내가 되어 있다. 4월 내내 나는 꾹꾹 참았지만 점점 짜증이 많아졌고, 무력해졌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은 심장박동수가 치솟아 가슴 통증으로 호흡 곤란까지 왔다. 마치, 십 년 전 ‘육아우울증’ 혹은 ‘육아번아웃’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글과 책에 몰두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정확히 2014년이었다.


 2024년. 이제 네 아이들은 스스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학교를 가며 자유의지로 사유하고 결정한다. 사람이다. 나는 십 년 전에 비해 늙었으나 상대적으로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다시 개육아의 세계로 초대되었다. (수동태로 쓴 것은 이미 많은 글을 써서 독자들도 알고 있으리라.) 시와 때는 참으로 묘하다. 마침 나는 회사 계약이 종료되어 집에 있게 되었으며, 마침 남편은 타국으로 긴 출장을 가고, 아이들도 학교와 학원 각자 일상을 사느라 분주하게 되었다. 뻔한 소설 결말처럼 직장 대신 무급의 가사노동을 가없이 해야 하는 엄마라는 역할을 맡은 내가 반려견을 온전히 떠맡게 된 것이다. (어느 집이나 비슷한 듯!) 가족구성원 그 누구도 대신하기 어려운 엄마의 자리, 주부의 자리. 도망가지 않고서는 해결책이 없는 그 세세한 집안일들(크게 눈에 보이는 빨래 청소 설거지 밥하기 장보기 외), 싱크대 하수구 청소, 집안 환기, 베갯잇 세탁, 창틀 사이 먼지 닦기, 쓰레기통 닦기, 쌀통 건조 등등.


 훈련이 안 된 힘센 개를 데리고 허리가 꺾이도록 산책을 하고 나면 베란다 똥오줌을 청소하고 때마다 간식과 식사를 챙겨준다. 사실 더 힘든 건 이 녀석의 시선이다. 그 누구의 방해나 관심 없이 오롯이 혼자 있고 싶지만 이 녀석은 나의 움직임과 행동을 관찰하고 화장실까지 따라온다. 이렇게 힘든 육아도 자식 예쁜 거 보고 이겨낸다 하지만, 난 애초부터 애정도 없고 동물이 예쁘지도 않으니 고통만 커져갔다.  이런 나를 두고 무심하고 못됐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하지만 누구보다 성실과 책임으로 이 가련한 생명을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돌보고 있다. 사랑은, 그냥 감정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무엇보다 난 이 녀석이 아프고 배가 고픈 걸 못 본다.


그런데 5월이 되니 PHQ-9 척도 합산 점수가 낮아졌다. 왜일까. 사람 마음은 왜 이리도 변하는 것일까. 4월에 끝내야 할 일들을 무사히 마쳐서일까, 둘째 아들 부러진 다리가 조금 나아져서일까. 두부는 변함없이 힘이 세고 천방지축이고, 나는 시간을 쪼개어 살고 있는데 말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라는 책 3부에서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하였다. 욕망, 기쁨, 슬픔, 놀라움, 경멸, 사랑, 증오, 끌림, 반감, 헌신 등등 우리의 감정은 생각보다 꽤 세밀하고 다양하다는 말이다. 강신주 박사는 <감정수업>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일상적 감정이 없어지면 행동능력을 상실하여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 인간 내면세계는 아무런 활기가 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였다. 이런저런 감정들로 뒤엉켜 내 감정을 부인하고 덮어버리는 것은 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지금 나의 우울증 척도 합산 점수가 낮아진 이유는 어쩌면 내가 얼마나 수고하고 애썼는지에 대해 격려하고 내 감정을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갑자기 궁금하다. 동물의 감정은 몇 가지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녀석의 꼬리를 보아하니 지금 심히 배부르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동생이 찍어준 '두부'와 나. 초록이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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