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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Sep 30. 2020

나를 붙잡는 순간들-3

오이꽃

나를 붙잡는 순간들-3, 오이꽃


나팔꽃이 허공에서

바람에 나부끼던 공터에는

노란 오이꽃도 하늘을 향해

노랗게 피어 있었습니다.


오이도 호박처럼

같은 줄기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어나는데

이 아이는 꽃 밑에

작은 아기 오이가 달려있지 않으니 수꽃입니다.


벌과 나비에게 꽃가루만 제공하고는

결실 없이 곧 지고 말 꽃입니다.


하지만 그렇던 말던

가녀린 긴 줄기 끝에

하늘을 향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모습으로 피어있는

오이꽃 하나가

내 마음속에 담겼습니다.



*

오이 / 허수경


어라,

아직 여름길은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오이넝쿨의 손은 하늘을 더듬더라

그때 노란 꽃은 후두둑 피기 시작하더라

아직 여름길은 나지 않았는데

바다로 산책을 나간 새들은

오이 향을 데리고 저녁이 닫히기 전 마을로 돌아오더라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더라

바다에 빠진 태양빛 같은 새들의 수다 속에서

꽃은 지고 오이 멍울이 화반에서 돋아나더라

여름길이 열리고 그 노란 꽃 가녘에

흰 나비는 스르르 속옷을 열더니 쪼그리고 앉더라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오이가 열리든 말든


#박용기의_사진공감_2 #나를_붙잡는_순간들 #오이꽃 #공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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