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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Feb 29. 2020

사주 이야기

사주팔자를 믿어도 될까?

연말도 지나고 해가 바뀌고 한적한 시골을 뒤로하고 북적이는 도시에 나왔다. 

아내 지인이 아내에게 안부 겸 걸려온 전화가 촉매제가 되었다. 혼자 가기 심심한 아내는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준다고 나를 유혹한다. 역시 남자는 유혹에 약하다. 아내의 지인도 나와 통화하며 도시로 오라며, 나 좋아하는 짜장면 사 준다는 말에 아내와 길을 나섰다. 당연히 여자들 수다에 남자가 있으면 어색하다. 

시골에 10년 정도 살았으면 뿌리를 충분히 내렸다고 본다. 그래서 도시로 향하는 엉덩이가 무거워지는데 그래도 아내는 엉덩이가 들썩거려지나 보다. 

 막상 시내에 다니다 보면 그다지 갈 곳이 없다. 서점에서 한두 시간 보내고  혼자 빈둥거렸다.

다리 아프면  차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도 좋다고 해서 유명 커피 전문점을 찾아갔다. 시실 요즘 차 한 잔 값이 어지간한 점심 한 끼 값과 맞먹어서 시골 촌부가 쉽게 가기는 선 듯 쉽게 가지지 않았다. 

서점에서 두 권 산 책을 보면서  저녁때까지 아내를 기다리기로 했다.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의 삶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들어왔다. 분위기에 술도 먹지 않았는데 취한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요일에 좌석은 제법 차 있었다. 차 한잔을 주문하고 기다린다. 검은색 면티에 검은 모자를 쓴 바리스타들이 손놀림이 아주 바쁘다. 

오랜만에 나온 도시는 명절을 일주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복잡하다는 느낌이다. 찻 집 안에는 공부하는 카공생부터 주일에 모처럼 아는 사람과 담소를 즐기는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었다. 

남이 하는 이야기를 굳이 듣고 싶지 않아도 귀가 열려 있으니 사람들 말소리가 귀에 들린다. 

양력으로는 해가 벌써 바뀌었다. 주변에서 사주를 보았네 혹은 어느 점집을 가 보았네 하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내가 앉아 있는 주변에 중년의 아저씨들이 한 그룹 앉아 있고  맞은편 테이블에 중년 아주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는데 이야기가 사주 본 이야기였다. 나도 사주 명리학과 주역을 공부하고 가끔 사람들 봐주고 이야기를 해 주지만 은근히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궁금히 여기는 게 신기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보통 중년의 나이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그런 운명이니 사주니 점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할 터인데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도 그렇고 서로 찾아가 보았던 곳에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사는 게 예전처럼 예측 가능하지 않은 시대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젊은 대학생이나 삼십 대 초반의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점을 보았다니 사주를 보러 갔다느니 하는 이야기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얼마 전 어느 신문기사에 젊은 이 삼십 대 사람들이 사주 명리학 공부를 많이 한다는 기사가 났다. 

어디 가서 물어보느니 답답한 인생살이 자신의 것은 자신이 풀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한다고 하니 예전에 삼사십 년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시대는 한 참 뒤처지는 시기이지만 그 시절은 지금처럼 세상살이가 불확실하지는 않았다.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했고 편법이 난무했지만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했다. 대중들도 먹고사는 절박함에서 벗어나 돈을 벌기 시작하였고 삶이라는 게 나름대로 재미있던 시절이었다.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으로 한 곳에 꾸준히 오랫동안 일 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훨씬 나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이니 사주니 점은 그냥 재미 삼아 보는 것쯤으로 치부되었다. 

그때와 지금은 살아가는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 노력한다고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늘 불안하다. 

미래를 알고 싶은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일 수 있다.

다만 사주를 풀어 주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는 되도록 회피하며 이야기한다. 굳이 나쁜 이야기를 해 주어서 상담하는 사람 기분을 나쁘게 해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연초가 되면 사주를 볼 줄 아니 종종 소개로 연락이 온다. 오히려 한 해 신수 이야기를 해 주기는 쉽다. 그해에 조심할 일이나 혹은 피해야 할 일 정도는 이야기하기 쉽지만 사주 전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조심스럽다. 

예전에 나에게 사주명리학을 가르쳐 주던 선생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그 사람 사주로 그 사람 일생에 대한 전기는 쓸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조금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차츰 공부를 하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도 보인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편히 지낼 수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말년 사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금 황당하게 들리지만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에 대한 물음을 던질 때가 있다. 

사주에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지만 알 수 있다. 어떤 오장육부에 병이 생겨 죽는 것 까지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사주명리학은 자연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학문이다. 그래서 자연을 잘 살펴보고 자연의 순행을 보개 된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혹자들은 사주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사주는 속일 수 없다. 사주는 풀이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른 차이지 사주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주 명리학은 오천 년의 역사 동안 꾸준히 발전해 왔다. 그런 학문이 만약 그렇게 얼토당토 하지 않았다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풀이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을 뿐 결코 믿을 수 없거나 혹세 무민하는 그런 학문이 아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설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사람들은 한 해의 각오를 다진다. 사주는 흉한 것은 피하고 길한 것은 따른다. 나쁜 운이 있을 때 무리하지 말고 좋은 기운이 왔을 때 놓치지 않아야 한다. 

사주는 자기 자신의 절제와 겸손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사람들은 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길을 닦는다는 말일까

사주는 사람이 가는 길을 알려 주는 일종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 

깊고 깊이 자연을 관찰하고 우주의 변화를 공부한다면 이렇게 정확한 학문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사주 명리학은 철학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과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를 느끼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등배와 같은 학문이다. 

해가 지고 배가 고프다. 슬슬 짜증이 나려는 순간 아내에게서 전화가 온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여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많아 그렇다고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중국 집으로 오라고 한다. 미안 하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나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테이블의 찻잔을 정리하고 커피집을 나선다. 아직 정월이 되지 않아 해가 진 저녁 공기가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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