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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Jan 28. 2020

설이 다가오면

1985년 이후에 음력설을 쉰다. 달력을 봐도 양력설은 하루 쉬고 다음 날 출근한다. 길게는 오 천년 짧게는 이천 년 이상 내려온 우리의 풍습이 그리 쉽게 바뀔 수 없다. (예전에 양력설을 세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던 시절이 있었다.)

진정한 설이 이제 자리를 잡아간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 긴 겨울 방학 동안에 설을 맞으면 집 안은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왕래로 북적거리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방앗간에는 떡국 떡을 뽑기 위해 줄을 서 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다니던 나는 음식 준비로 바쁜 엄마 대신 줄 서있고 서울에서 방학이라고 놀러 와 있던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고모와 놀면서 대야에 가득 불러 놓은 쌀을 차례로 움직이며 동네 골목에서 뛰어놀았다. 

대부분 동네 방앗간에서 쌀을 찌어 떡을 뽑았으니 동네 골목 친구들 역시 어머니를 대신해서 방앗간 줄을 서기는 마찬가지였다. 새치기는 생각도 할 수 없고 서로서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은 질서라는 게 뭔지를 알 수 있기에 충분한 광경이다. 

이제 차례가 되어간다. 고모에게 지키라고 하고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음식 준비에 정신없는 어머니에게 차례가 다가온다는 말을 하면 어머니는 이야기 다 해 놨다며 이름만 대면 알아서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어머니에 '누구 이름?' 하고 물어보면 '우리 맏상제 이름!' 하고 말씀하신다. 

상제라는 말이 언듯 듣기에는 뭐 그리 좋은 뜻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이 상주가 된다. 뭐 특별한 뜻이 있어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 (그때는 아들에게 우리 상제 우리 상제 하며 불렀다. 그렇게 하면 어른들이 오래 산다고 생각했다.)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내 이름이 떡을 뽑는 중요한? 일에 쓰이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심심해하던 동생들이 따라가고 싶어 한다. 얼근 가지고 재촉하고 동생들을 데리고 방앗간에 간다. 

벌써 우리 집 쌀을 담음 대야는 방앗간 안으로 쑥 들어가 있다. 고모는 왜 늦게 왔냐며 눈을 흘긴다. 동생들은 고모와 놀고 있고 나는 대야 앞에 서서 곧 다가올 차례를 기다린다. 겨우 방앗간에 떡 뽑는 차례를 기다리는데도 가슴이 콩당콩당 한다. 

차례가 다가오고 나를 알아보는 방앗간 집 할머니가 아저씨를 향해서 떡 뽑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아저씨는 '예'라고 대답하고 이내 입 다물고 무겁게 느껴지던 대야를 번쩍 들어 방아 기계에 쌀을 부어 넣는다. 

흰 가루가 미끄름 틀같이 생긴 아래에서 나와 대야에 쏟아진다. 그쯤 명절 준비를 하던 어머니 명절 며칠 전부터 와 있는 오촌 아주머니와 함께 방앗간에 들어온다 주변 이웃들과 가볍게 인사하고 방앗간 할머니는 조금만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신다. 

그제야 나는 자유의 몸이 된다. 바깥 날씨는 쌀쌀 하지만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 쏟아져 나와 시끌벅적하다. 

작은 공 하나로 골목을 누비며 축구를 하고 추운지 더운지 모른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뭐 날씨가 가 피부에 느껴질 여유도 없다. 

어머니와 당숙모들이 뽑은 떡을 들고 집으로 가시는 모습이 보인다. 고모는 여동생의 손을 잡고 어머니를 따라가고 나와 남동생은 그대로 남아 골목에서 논다. 

빨리 지는 겨울 해가 야속하다 생각되지만 하나 둘 골목에서 놀던 친구들은 집으로 향한다. 나도 동생과 함께 집으로 향한다. 

음식 냄새가 집 안에 한 가득이다. 이제 어느 정도 음식 장만이 끝이 났는지 어머니와 숙모들이 감주를 마시며 쉬고 있다. 

시원한 감주 한 잔과 함께 먹는 떡국 떡의 맛은 졸깃하고 쌀 특유의 단 맛까지 더하여 입이 행복하다. 갖 뽑은 떡국 떡에 김이 모락모락 난다. 한 덩어리 손에 뜯어 쥐어 주면 떡국 떡을 하얀 설탕에 찍어 먹는다. 

말해 뭘 해!

내친김에 겨우내 익은 나박김치까지 한 사발 가지고 아예 저녁 끼니를 해결한다. 

그렇게 이루 이틀 전으로 다가온 설 명절의 밤은 깊어간다. 이제는 방앗간에서 쌀을 빻고 떡국 떡을 내려 먹는 집이 그리 많지 않지만, 방앗간도 그리 많지 않지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방앗간 앞의 모습은 없다.

그래도 방앗간을 지나갈 때면 손뜨개 한 옷을 입고 찬 공기에 발개진 얼굴에 입에는 흰 김은 내뿜으며 뛰어다니던 작은 아이가 나를 힐끔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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