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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Jun 16. 2022

전원 교향악을 읽고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은 이성을 앞선다. 

본능은 생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몸에 익숙한, DNA가 기억하는 몸의 습관처럼 기억하고 있는 행동이다. 

이성에 대한 끌림도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다. 그저 호감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을 한다.  

이성과 본능은 마치 마음속의 악마와 천사가 존재하는 모습과 같다. 

마음 따로 몸 따로라고 했던가!

도덕이나 윤리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사람의 본능이다. 사랑은 이성으로 생각할 수 없는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이 성적이든 아니면 관계를 유지하고 싶던 이성에 대한 문제는 누구에게도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고결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성에 대한 집착이 생기면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  마음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성선설이던 성악설이든 본래의 마음이 착하냐 악하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본능이 무조건 악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성이 또 한 선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선과 악은 경계가 없다. 선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악으로 변한다. 사람의 마음은 늘 갈등한다. 

갈등은 선택에서 생겨난다. 사람은 뭔가에 늘 선택을 강요받는다. 

자유의지가 있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아무런 족쇄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족쇄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는 바로 인간을 나타내는 신이다. 

본능과 이성이 두 얼굴의 인간을 말한다. 

빛과 그림자!

빛이 있는 곳에 사람은 서 있다. 검은 그림자를 곁에서 떨어져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빛에 서 있던 사람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 있다. 그림자는 모습을 숨기기 좋다. 

그림자는 마음이다. 드러내 놓고 싶지 않다. 숨기고 싶은 욕망이 그림 속에서 꿈틀거린다. 

이성적인 행동과 본능적인 행동에는 욕망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에 따라 

욕망은 블랙홀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욕망이 꿈틀거리는 순간 선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은 사라진다. 

이기심은 욕망과 함께 자리 잡는다. 

선의 탈을 쓴 악한 본능은 욕망이 만들어 준다. 

성직자는 모든 욕망과 본능을 누르고 이성과 신앙의 힘으로 살 수 있을까?

성직이라는 말을 뜻 그대로 풀이한다면 성스러운 직업이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의심하지 않는다. 신의 대리자이기에 지극히 공경하고 섬기는 마음까지 가진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할 일은 성직자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지극히 인간이 가지는 본능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완전체가 아니다. 실수도 하고 욕심도 생긴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신과 인간의 중간쯤으로 생각한다. 중간?

중간이란 없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본성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목사는 소녀에게 품은 연민의 정이 사랑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한 이성에 충실하는 동물이 아니다. 

남자는 상대 여성의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한다. 

유럽은 두 차례의 전쟁을 겪었다. 인간성의 상실과 신에 대한 절대 믿음은 사라졌다. 수많은 학살이 일어났으며 수많은 죽음 속에 신은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 속에 성직자들은 그 죽음을 외면했다. 오히려 죽음으로 향해 가는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정치세력에 부합하여 그들을 사지로 내 몬다. 

구교나 신교를 떠나 성직자들이 보이는 두 얼굴 속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결국 순수한 감정을 왜곡당하는 인간에게 더 큰 고통을 줄 뿐이다. 

혈기 왕성한 10대 후반이라고 할까 이제 갓 20대라고 할까?

젊은 20대에 읽었던 감정과 나이를 먹고 같은 책을 읽었을 때의 감정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사랑에 배고픈 20대 청춘이 끓어오르던 시절에 소녀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목사 아들은 개종과 수도원으로 가버린 그아들이 아버지에서 썼던 글 속에 원망을 넘은 증오가 서려 있던 단순한 모습만이 떠 올랐다. 

참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 같지만 나는 주인공 목사의 행동에서 그는 마치 착한 목자와 같은 모습이지만 깊은 내면에서 가지는 이성에 대한 욕구와 종교라는 탈을 쓰고 사람이 어떻게 사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과연 그 목사가 사악하다는 표현으로 그의 잘못을 말해도 되는 것일까?

육체로 사람을 고통을 주고 잔인하게 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악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고통만이 사악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신을,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농락하는 일이 오히려 더 나쁠지 모른다. 

양을 탈을 쓴 느대라고 말할까

성직이라는 거룩한 일에 앞서 사람의 본성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은 아니라고 계속 부정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그 악마와 같은 성질을 숨길 수 없다. 

악마의 본성은 잔인함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속에 온갖 욕심을 스스로가 다스리지 못할 때 마음속에 깊이 봉인되었다고 착각하는 악마의 본성이 살아 나오고 그 살아 나온 악마적 본능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도 파멸로 몰고 간다. 

종교인 즉 성직자들의 모습은 숭고하고 자기희생적이며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전제를 깔고 있다. 

종교인이 신앙심과 이타적 사랑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을까? 

다른 생각이 머리에 있지 않을까? 신앙은 잊은 지 오래되었고 자신의 생계 수단으로 종교가 이용되고 있지는 않을까? 

책 속의 주인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게 신앙심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다. 타성이 잦어 있을 뿐이다. 초심은 어디로 사라지고 그는 그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할 뿐이다. 오랜 결혼 생활에서 오는 아내에 대한 지루함이 새로운 이성의 만남이 그 상대방에게 종교인으로 선행을 베푼다고 하지만 선행이라는 행동이 자기만족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눈이 멀어 세상이 암흑이라고 느꼈던 여자 주인공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목사 부인의 불행한 얼굴 표정을 보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힌다. 그는 자신을 구해 준 목사의 아들과 진심으로 사랑을 하지만 목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침묵의 압박이 그녀를 괴롭히고 그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된다. 

소녀를 구해 준 일은 동정심 때문이다. 그 목사는 오랜 결혼 생활에서 오는 아내와 갈등이 있었다. 

아마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녀를 투영시켜 자신의 마음 깊숙이 박혀 있던 사랑이 용솟음쳤고 그 사랑의 감정에 자기만족이 불같이 일어났다. 

사랑을 잃어버린 아내는 그가 목사로서 행하는 선한 행동-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일에 조금 지쳐 있었다. 

함께 살아가는 동안 남편의 직업적 모습과 위선적 행위를 보고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 또한 성스러운 이타적 삶이 그와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그녀 자신을 무관심으로 몰았다. 사랑이 식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살아나지 않는 상태에서 남편의 그저 직업으로서 보는 성직에 대해 그녀 자신의 사생활이 침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롭게 비친다. 

나이를 가름할 수 없는 소녀는 사실 거의 성숙한 나이였지만 환경 때문에 그런지 그다지 몸집이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동정심이었을 뿐이다. 이타적 정신을 가진 사랑과 동정심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는 동정심이었다. 그저 목사라는 성직에 주어진 무게 때문에 소녀를 돌보았다. 그리고 비록 눈이 먼 소녀였지만 그녀를 씻기고 다시 입혔을 때 그 소녀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그를 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아주 천천히 천천히 빠져 들게 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과연 성직자들의 마음은 신에 대한 굳은 믿음과 인간애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일까?

혹시 처음 자신이 성직에 뛰어들었을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지는 않을까?

주인공은 가족을 거느리고 사는 목사였다. 그리고 늘 그렇게 하여 왔듯이 자기 이웃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죽어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신의 품에서 편안히 맞이 하도록 하는 지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그의 신을 향한 소임이 정말로 순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위선이 그곳에 숨어 있고 자신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 신앙을 이용한다. 

신의 믿음으로 실천하는 사랑은 위선이었다. 

주인공의 사목 활동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무너지는 인간적인 면이 보인다. 

결국 주인공 목사의 이기심은 그 소녀에게 광명을 주었지만 그 소녀가 마주한 한 여인의 슬픔과 불행을 눈으로 보았고 그녀의 그런 순수한 마음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 

아버지의 위선을 본 아들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과 목사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수도사가 되어 아버지에게서 아들 스스로가 아버지의 자식을 빼앗는 결과를 만들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정은 아무리 종교적 믿음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녀는 자신을 불태우고 사라졌다. 소녀의 이타적 마음과 목사의 이기적 마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악함과 선의 경계를 보여 주었다. 

악은 선으로 포장된다. 누구도 선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완전체인 듯 보이는 인간은 결국 불안전한 모순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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