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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Jun 15. 2022

전쟁의 슬픔

"'꽈 꽝 펑' 

작열하는 포탄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멀 곳에서 들리는 듯 귓전을 맴도는 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잠시 뒤에 아비귀환 같은 비명소리가 들렸지!" 

"사방에 사람 팔다리가 잘리고 배가 터져 내장이 튀어나온 모습,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가 폭격이나 포격이 지나고 나면 보이는 모습이었지!"

그 말씀을 하시고 어머니는 먼 산을 초점을 잃고 바라보셨다. 

역사는 늘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는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고 지금 이 시간이 흘러가면 또 과거가 되어 역사라고 불린다. 

역사는 우리의 거울이다. 바라 보고 모습을 고치고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듯이 역사도 한 공동체의 생존과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 슬기로운 지혜를 준다. 그러나 결국 또 같은 실수를 한다는 아이러니도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를 젊은 시절에 겪은 어머니는 전쟁 이후 4.19 혁명이나 5.16 군사 반란에 대해 생각이 나시면 무심코 한 말씀씩 던지신다.

그 시절 직접 겪었던 이야기여서 가끔 재미를 가미해 말씀하시지만, 해방 전과 6.25 전쟁 이야기는 어머니의 재미있는 입담 뒤에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아파 옮을 느낀다. 

그때의 말씀도 방송이나 무슨 날이 되시면 한두 마디 하시는 게 전부다. 잘 말씀도 하시지 않는다.  

무슨 좋은 기억이라고 말씀하실까!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니니 되살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는 듯했다. 

그래도 가끔 텔레비전에서 하는 전쟁  다큐를 보다가 기억의 작은 조각을 끄집어내시어 마치 휴지조각 던 지 듯 말씀하시곤 했다. 

전쟁 때 이야기가 더 무섭고 실감 나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나 외삼촌들이 한국 전쟁에서 직접 경험을 한 모습이기에 더 무섭고 몸서리쳐진다. 

텔레비전에서 유월의 한국 전쟁과 팔월 광복절이 되면 일제 강점기에 해방을 맞는 때에 그 시절 기록물을 상영했다. 

지금이야 그런 흑백 기록영상을 잘 방영하지 않지만 대략 40년 전에는 군사 독재 시절이고 해서인지 기록영상물을 방영을 꼭 무슨 날이 되면 두세 군데 방송국뿐인데 비슷한 내용의 영상을 특집이랍시고 많이 방송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노는 날이라 무조건 조아라 했다. 공휴일로 정해진 날이라 느긋한 아침을 맞을 수 있다. 허둥대고 서두르는 이른 아침을 멀리하고 꽤 늦은 오전 시간을 이불속에서 뒹굴고 아침 겸 점심을 먹은 우리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온 가족이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줄 과일이나 후식을 가져오신다.

전쟁기록물이나 그 시절의 생활모습이 흑백으로 나오면 어머니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툭 내 던지듯 말씀하시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침묵 속에 담배 연기만 내뿜는 모습과 어머니의 말없는 과일만 깎으시는 무거운 공기가 잠시 흐르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의 외가는 평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평양시내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와 외삼촌들에게 늘 들었다. 

해방 전 평양 이야기를 듣고 자라 그런지 대동강이니 모란봉이라는 단어는 귀에 아주 익숙했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6.25 한국 전쟁에서 어머니와 외삼촌들이 겪었던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이맘때가 되면 어머니나 외삼촌은 전쟁을 겪으면서  아주 가끔, 그러나 듣고 나면 충격적인 그 시절의 일을 들려주셨다. 

특히 전쟁은 군인들 간의 전투보다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겪는 고통이 컸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아직도 전쟁 때 있었던 일을 잘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어쩌다 기억의 파편처럼 하나씩 던지는 이야기는 전쟁 영화의 낭만을 머릿속에서 비워버리게 만든다. 

소대장으로 참전하신 외삼촌은 가끔 여름휴가 때 부산에 오시면 우리에게 군에서 경험하신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다. 특히 소름 돋는 말씀은

"야간에 고지를 지키기는 우리와 고지를 빼앗으려는 공산군과 몸과 몸이 부딪히는 백병전이 자주 있었지! 그때 어떻게 아군과 적군을 구별했는지 아니?"

우리는 흥미진진한 전쟁 이야기에 눈을 초롱 거리며 듣고 있었다. 어리고 철없던 시절이다 보니 그저 영화에서 나오는 전쟁의 모습이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영화에서 보았던 전쟁에 대한 낭만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이었으니 뭘 알겠는가!

외삼촌은 약간 슬픈 듯한 미소를 띤 뒤에 말씀을 이어 갔다. 

"상대의 머리를 손으로 우선 확인하지. 그리고 머리가 까까머리면 칼로 찌르고 삽으로 내리쳤지! 그리고 머리카락이 잡히면 그대로 놔주었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웩"하는 소리를 내든지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뜨고 만다. 

너무나 잔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영화에서는 총검으로 찌르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도 잔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삽으로 사람을 내리치다니..... 몸이 떨렸다. 

어머니는 술상을 내어 오시며 

"오빠는 애들에게 뭐하러 그런 소리를 해요!" 하며 핀잔을 주시고 외삼촌은 그저 허허하며 너털웃음으로 화답하셨다. 

머리를 빡빡 민 까까머리이면 칼로 찌르고 머리를 쥘 때 머리칼이 잡히면 그냥 뇌 주었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과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머리를 삽으로 내리 친다는 말이 우리에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총검술이 있을 것이고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전쟁영화에도 그런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였다. 

기억은 세월이 흐르면 잊힌다. 전쟁을 겪은지도 오랜 시간이 흘렸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죽거나 거동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쇠하였다. 그 세대가 떠나고 나면 역사 속에 남은 잊힌 전쟁이 된다. 

고통의 시간은 망각 속에 빠지고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게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놓인 시절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생존과 죽음이 늘 종이 한 장만큼이나 엷어진 시절에 사람들의 고통을 말해 뭐하겠는가!

공포, 죽음이 난무하던 시절에 영웅담이니 애국심, 용기와 같은 단어는 사치스러울 따름이다. 

그 시절 외삼촌이 부대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백"이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영어에서 back라는 단어인데 '뒤'라는 뜻이지만 그 시절에는 뒷배경이 든든하게 있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즉 고관대작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와중에도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었다. 

요즘도 가끔 병역 회피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 나도 씁쓸한 기분에 입 안이 쓰다. 

죽음은 다들 피하고 싶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공평하지 않는 삶에는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 시절! 절체절명의 상황 나라가 백척간두에 있을 때도 그렇게 병역을 빠져나간 자들이 오늘날에도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는 사실은 과히 충격적이다. 


모든 느낌과 형상을 떠나서 나는 죽음과 슬픔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나는 전쟁을 체험해 보지 않았다. 아마 전쟁을 겪었다면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저승사자라고 할까!

만약 내가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면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말씀하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죽음 뒤에는 반드시 슬픔이 따라온다. 죽은 자와 피를 나눈 부모 형제 자식과 배우자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알고 있는 모든 이가 슬퍼한다. 그리고 가슴속에 깊이 죽은 이를 묻는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죽은 사람보다는 남아 있는 사람은 그 허전함과 슬픔을 견디기 힘든다. 


남자 아이라 그런지 아니면 아버지가 전쟁 영화를 좋아해서 아버지 옆에 자석처럼 붙어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전쟁 영화를 즐겨 보았다. 

멋있었다. 전쟁 영화 덕분에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때 하기도 했다. 멋진 제복과 일사불란한 모습이 어린 남자아이의 마음을 빼앗을 했다. 

외삼촌이 직업 군인이라 가끔 군복을 입고 집에 오시는 경우가 있었다. 군사 정권 시절이었으니 영관급 장교가 동네에 나타나면 그야말로 우러러보던 시절이었다. 

계급장을 번쩍거리며 6.25 전쟁 때 받은 훈장과 기장이 가득 달린 군복에 깔끔하게 맨 넥타이와 정모를 쓰고 택시에서 내려 골목을 걸어오시는 외삼촌! 

잘 생긴 얼굴에 큰 키는 지나가는 동안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족했다. 

골목에서 뛰어놀다가 외삼촌을 보면 달려갔다. 나의 외삼촌이라는 것을 친구들과 만인에게 자랑하고 싶은 어린 마음 때문이다. 

문 앞까지 도착한 외삼촌을 '외삼촌' 하고 크게 부르면 외삼촌은 집에 가자고 기다리시고 나와 남동생은 외삼촌을 향해 달려갔다. 

친구들이 우러러보는 모습에 어깨를 우쭐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면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시고 그날은 아버지가 일찍 퇴근해서 외삼촌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나는 외삼촌의 정모를 쓰면서 군인이 되겠다고 했고 외삼촌은 

"글쎄다. 네가 좀 더 머리가 크면 군대 가기 싫어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할 텐데."

하고 말씀하시면 

"아냐! 나는 꼭 외삼촌 같은 군인이 될 거야!"

하고 말하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즐겁게 웃으셨다. 

(결국 군대 가지 않으려고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하다가 억지로 3년 군 생활은 했다)

참 철없었다. 영화 속에 전쟁을 낭만으로 생각하고 군인이 되겠다고 우겼으니 말이다. 

철이 들고 대학을 갔다. 초등학교 6년과 중고등학교 6년의 교육은 나에게는 갑자기 의미가 없는 교육기간이었다. 책을 통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갑자기 나를 지탱하고 있던 역사가 무너졌다. 

어머니와 퇴역한 외삼촌의 이야기와 역사를 전공한 덕분에 알게 된 전쟁의 참상에 나는 한 때 내가 꿈꿨던 미래의 직업을 너무 낭만적으로만 생각한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전쟁을 겪은 외삼촌과 어머니의 이야기는 소름 돋아 나는 이야기였으며 무서움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피난길에 피난민들이 폭격을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이야기하신 적이 있다. 좀처럼 6.25 때 겪은 일을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대학생이 되었던 어느 날 아주 짧고 간단하게 그때의 말씀을 해 주셨다. 

피난길 포탄에 맞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이 산채로 불에 타는 이야기에 나는 숨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너무 슬퍼 눈물이 나기도 했다. 

1.4 후퇴 시절 기차 위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 얼어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느끼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화물기차 위에 추위에 떨면서 전쟁 초기 인민군 치하에서 공포에 떨었던 사람들은 남으로 향했다. 

거창한 말로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그곳에서 겪었던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움직였다. 죽음의 공포를 함께 느꼈으니 죽든 살든 피난을 가야만 했다. 

공포는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한다.

뭐 비유가 타당할지 모르지만 속담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한다. 맞기 전에 무서움에 떠는 것보다 어차피 맞을 것, 먼저 맞으면 맞기 전의 무서움은 없으니깐.

기록 영화에서 한 장면이 생각난다. 쓰러진 어머니 옆에서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본다. 그 영상에 그 어린아이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무서움이 서려 있다. 아니 공포 그 자체였다. 산 사람들은 오히려 죽은 사람을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하니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전쟁이란 한 사람의 일상을 무너지게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죽게 만든다. 

그런 전쟁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역사에서도, 지금도 계속 전쟁은 있어 왔다. 

얼마 전 유럽에서 총성이 멎은 지 70년여 년이 지니고 다시 총성이 들렸다. 100년도 체 지나지 않아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모든 전문가들의 예상의 뒤엎고 유럽 동부에 있는 우크라이나에 러시아가 전면전을 시작했다. 

역사에는 정치와 경제 사회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결국 전쟁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구성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려고 그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 사이에 군인이 아닌 사람이 있다. 그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그들, 군인이 아닌 민간인에게 드리우고 있다. 

70년 전 한국에서의 비극이나 지금 우크라이나의 비극이나 다를 게 없다.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고 이겨야 진정한 승리라 했다. 

아무리 국가가 힘이 없어 손해를 본다고 해도 자존심으로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존심을 버리는 쪽이 더 좋을 수 있다. 

내가 그리고 네가, 그리고 우리가 너희가, 어떠한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 존재의 모든 세상은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전쟁!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우리나라 그리고 세계의 어디에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커다란 대의에 따른 평화주의자라 그런 것도 아니다. 

내 삶과 나의 일상이 무너지고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서 있기 두렵기 때문이다. 

일상이 무너지고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서 산다면 내가 가진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유럽의 한  구석에서 난 전쟁이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에게 기도한다. 

'저의 일상이 깨지지 않게 해 주소서!'

그리고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드는 어리석은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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