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아 Sep 28. 2022

산 자와 죽은 자

산자의 남은 몫은 죽의 자가 남긴 그리움과 사랑!

 생에 대한 애착은 무섭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자연의 커다란 순환 속에 자신도 거기에 속한 일부라고 깨닫고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죽음에 저항하고 살려고 하는 애착을 드러낸다.

세상 삼대 거짓말 중에 '늙으면 어서 죽어야지' 하는 말과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 그리고 총각이 장가 안 간다라는 말이다.

살만큼 산 사람도 죽음의 순간 삶의 애착이 더 심하다고 하지 않던가!

왜 두려워할까?

모든 게 끝이기 때문이다. 모든 게 중심에서 떠나간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하나 두려운 이유는 삶에 회한이 남기 때문이다. 후회가 남고 미련과 아쉬움 때문에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만족한 인생을 살았다고 마지막 순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여름의 열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초록이 짙어져 가던 어느 날, 일 년에 한두 번 사주와 신수를 물어보던 사람이 전화가 왔다. 

급한 듯한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심각한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부 물을 사이도 없이 

"선생님! 사주 하나 급하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생년월일시를 말을 한다. 목소리는 떨리고 다급했다. 지금 전화로 물어보겠냐 했더니 주말이 오겠다는 말한다.

전화를 막 끊으려니 그녀가 소리친다. 혹시 내가 전화를 끊을까 봐 그랬던 모양인데 한 가지만 말해 달라며 다시 묻는다.

만세력을 펴 놓고 사주 기둥을 세웠다. 

대운을 적고 사주를 보는데 이미 운이 다 한 사람이었다. 죽을 수도 있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할 사주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주였다. 

사주라는 게 참 묘하다. 

늘 사주를 보면서 생각하지만 사주는 자연이다. 

'자연의 이치에 사람이 살아가는구나' 

를 느낀다.

죽음도 자연의 일부이며 삶의 일부라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 공부를 하는 나도 가끔은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커다란 자연 속에 일부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

전화 목소리로 사주 주인공의 수명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곧 죽을 운에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사주에 수명이 보여도 다 말하기는 싫었다. 굳이 사람의 수명을 이야기해서 뭐 하나 하는 생각에 늘 오래 산다고 말한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올해 혹은 이 삼 년 안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자꾸 솔직히 말해 달라고 보챈다. 보이지 않는 대상과 전화로 오래 이야기를 하니 피곤하다. 

솔직히 말해 주고 주말에 오면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올해 위험한 운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죽을 사주지만 그냥 위험하다고 에둘러 말한다. 나쁜 운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  

너무 솔직해도 상대가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렇게 주말에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책까지 뒤져 보면 사주를 살폈다. 실수하면 안 된다. 사실 사주명리학도 학문이다.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다시 앉아 풀어 보았다.  

火가 강해 금을 녹인다. 화가 남편도 되지만 자신의 힘을 빼앗는 오행도 된다. 木의 날, 여름에 태어났고 불이 강해 물을 살리는 금이 녹아 나 물이 말라 가는 사주다. 水의 기운을 살리는 金의 힘이 여름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주다. 공부 자리가 약하든지 부모님이 일찍 계시지 않는 사주였다. 

그리고 운이 나무의 운(木運)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불을 더 맹렬하게 만든다. 태어난 목의 힘이 강해서 좋은 사주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운 여름의 목마름만 심하다. 

사주로 봐서는 지금 모든 재물이니 집안 형편이 기울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운명이 끝을 달리는 수도 있다. 

너무 여유롭게 이야기를 해 주었나? 여자는 올해 정말 좋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온 여자는 시들어가는 꽃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가 포효하는 사자 같은 음성으로 변하기도 했다. 마치 폭풍에 흔들리는 배처럼 감정은 요동치고 있었다. 사주의 주인공과 관계가 깊은 사람이었다.

혹시 해서 사주를 놓고 주역점을 쳤다. 관의 기운이 주인의 효를 극하는 형국이 보였다. 몸이 좋지 않거나 나쁜 일로 관청을 들락거리는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나쁜 일은 서로 말하기 힘든다. 오죽 답답하면 그렇기야 하겠냐고 생각하지만 감정이 조절되지 않으면 가끔 나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난감하다.


그래도 사주를 봐주는 사람은 사주를 보러 오는 사람이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하소연해야 하고 해소해야 한다. 때로는 해우소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털어놓고 나면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좀 전보다는 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사주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자매 같은 친구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고 지금껏 함께 했다면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린다.

혹시 폐나 대장 쪽에 병이 생기지 않았냐고 물으니 유방암이라고 한다. 

유방암!

사실 다른 암에 비해 사람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암이지만 정말 무서운 암이다.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친구가 유방암이라고 그렇게 펑펑 운다. 

병을 이야기하고 잠시 흐느끼는 여자가 묻는다. 살 수 있냐고.

어떻게 말할까?

뭐 유방암은 절제 수술하고 나면 사는 확률이 높지 않냐고 물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깊어지며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는 듯한 목소리로 그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나 살 수 있냐고 또다시 묻는다. 

말 그대로 난감하다.

평소 사주를 자주 보러 온 사람이라 내가 말하는 방식이 어떤지 감은 잡고 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쉽게 말하기 힘든다. 사주에 명이 다 되어 보여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대목에서는 거짓말을 한다.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아직 저승 갈 때가 멀었다고.

좀 전까지 올해 안에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냐고 되물었지만 그냥 얼버무렸다. 그 편이 상대도 나도 마음이 가볍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이라는 걸 쥐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니까!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을 때 희망의 빛이 살아나기도 하니까!

비록 죽음의 시간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병을 앓고 있던 여자는 자신의 수명은 그 잎과 함께 다할 것이라 생각하고 친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늙은 화가는 비바람 치는 어느 날 밤 그 잎새가 있는 곳에 생기 있는 잎을 그려 놓았고 그녀는 그 밤에 견딘 잎을 보고 몸을 서서히 회복하면서 삶을 부여잡지 않았던가.

물론 비바람 치고 추운 그날 밤 그림을 그린 화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희망은 좋은 것이라 하지 않았나!

며칠이 지나 주말이 되었다. 두 사람이 찾아왔다. 전화 통화를 한 분과 모르는 여자분이었다.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커피보다 재스민 향이 나는 차가 흥분을 가라앉게 하지 않을까?(재스민은 내가 좋아해서 마시는데 가끔 상담자들에게 한 잔씩 주니 흥분이 가라앉는 듯해서.....)

처음 보는 여자는 사주를 본 사람의 여동생이었다.

자초지종을 구구절절이 이야기한다. 이제 사십 대 초반인 환자는 이미 병원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민간요법을 찾아다녔고 사주까지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나도 솔직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올해 안 해 세상과 이별을 할 것이라는 말!

그 말을 하고 내 마음도 쓰라렸다. 

전화로 말했을 때와는 달리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녀들의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꼈다. 

친구와 여동생!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 그런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그들에게는 고통일 것이다.

환자가 혹시 전화 오면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본다. 여동생이 물어본다. 

살고자 하는 그 애착에 사주를 봤고 자꾸 물어보는 통에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단다. 

아픈 그녀는 살 수 있다는 그 말 한마디에 나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자꾸 보챈다는 것이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뭐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지 않던가!

사주를 보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꼭 앞으로 있을 일이니 점을 치러 오는 사람도 있지만 어디에다 대고  자신의 꽉 막힌 마음을 풀 곳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 사회는 정신과에 가는 일을 꺼린다. 미친놈 미친년 취급받기 때문이다. 요즘은 정신과 상담이 이상하지 않지만 그래도 정신과는 가기 조금 꺼려지기는 한 모양이다. 

거기에 비하면 철학관은 사주 봐주는 사람이 의사보다는 덜 부담스럽다.

나는 사람과 상담 뒤에는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깨끗이 잊어버린다. 일부러 잊기 위해 노력한다. 마음에 두고 있어 봤자 짐이 될 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가을날에 낙엽 날리 듯 힘이 없는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암을 앓고 있다던 바로 그분이었다. 이미 병원이고 어디고 모두 가망 없다는 말을 들었기에 내가 하는 말이 더 솔깃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다. 죽음의 고통을 혼자 안고 가는 여인의 모습이 착잡한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 힘든 중에도 사주로 자신의 몸에 맞는 음식이나 마실 차 종류가 있냐고 묻는다. 뭐 달리 먹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어서 金과 水에 속하는 음식과 약초를 알려 주었다. 차로 끊여 마실 수 있는 정도로만 알려 주었다. 

그녀는 그 쓰러져 갈 듯한 목소리도 자신이 투병하고 있는 상태와 먹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나는 열심히 들어주었다. 

무려 한 시간이 넘는 동안을 통화를 했다. 당연히 그녀가 지쳤다. 건강한 사람도 한 시간 이상 전화기 붙잡고 있으면 힘든데 하물며 병을 앓는 이라면 오죽하겠는가!

고맙다는 인사가 전화기 건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고 우리의 첫 통화는 끝났다. 

남편도 자식도 형제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두려움 속에 아픈 사람이 어떻게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순간순간을 견딜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측은지심에 귀찮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비록 내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 할지로 삶의 희망을 부여잡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를 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죽음과 싸우고 있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게 해 달라고 빌었다. 비록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마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낼 수 있게 되길 대자연의 힘에게 나는 빌었다. 

삼 사일에 한 번꼴로 전화가 왔다. 어떤 날은 목소리에 생기가 도는 날도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두 달간의 전화가 이어졌다. 나도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던 기억 때문에 생면부지의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전화가 오지 않은지 보름이 넘었다. 괘를 봐서는 이미 종점을 향하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지인과 그녀의 동생이 찾아왔다. 

과일 한 상자를 들고 온 그녀들의 표정에서 이미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별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그녀의 동생이었다. 

"참 여러 모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하던 언니가 선생님 때문에 잘 견디고 편히 갔어요!"

말을 하는 그녀의 젖은 눈에 나도 모르게 전염이 되는 듯 눈가가 젖어왔다. 

"그렇게 살고 싶어 했는데 그래도 선생님이 말 벗을 해 주시는 바람에 고요히 편히 떠났어요. 살아야겠다는 애착이 심해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는데 통화 한 뒤부터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더군요."

나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줬을 뿐이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고 애써 내가 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사람은 모두 죽지만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녀도 처음 나와 통화할 때는 삶의 미련이 너무도 많았다. 어떤 날은 나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런 날은 나도 언짢았다. 내가 너무 오지랖을 떠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켰다. 

아이들 걱정, 남편 걱정, 형제자매에게 섭섭하게 굴었던 모든 일이 생각난다면서 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살아왔던 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친구의 죽음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그리움을 던져 주고 갔어요. 시간이 지나면 잊어지겠지만 아직은 힘이 많이 드네요."

그녀가 남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과 그리움이었다. 죽은 자가 던진 산자의 몫이었다. 

검은 양장을 입고 멀어져 가는 그녀들을 보면서 그녀들의 가슴속에 죽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그리움은 언젠가 망각이라는 약에 잊어진다. 그래서 사람은 그리운 사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비록 얼굴은 보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떠나는 길이 나의 미약한 힘으로 편안할 수 있었다니 마음 한 끝에 묵직했던 짐을 벗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전 06화 부부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