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리
골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놀고 있다. 더운 날씨 앞에 모두 지쳐 있지만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는 오히려 우렁차다. 이제 공놀이가 한 판 끝나고 모두 기철이네 아버지가(주로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에 출근하셨다. 기철이 아버지는 술집을 하시던 분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사주신 아이스 케키로 더워를 달랜다. 지금처럼 30도 이상 올라가는 여름 더위가 아니다. 28도 29도 가 되면 덥다고 뉴스에서 낮에 활동을 자제하라고 하는 방송이 나올 정도의 날씨다.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으면 코 끈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에어컨은 필요가 없다. 집마다 있는 선풍기 한 대가 여름 더위를 식혀 주기에 충분한 유일한 가전제품이다.
게눈 감추던 먹어 치우고 아쉬운 입 맛 때문일까. 막대기를 졸졸 빨고 있다. 아직은 단물이 조금 나오고 있다.
원철이 집에 있는 커다란 돗자리를 주현이와 주철이 형제가 원철이랑 같이 들고 나온다.
우리는 일제히 신발을 벗고 돗자리 위에 둘러앉는다. 어른에게도 큰 돗자리는 아이들 여럿이 드러누울 수 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하지만 차가 드물던 시절 골목은 그런 풍경이었다.
더운 여름 집집이 창문을 열어 놓고 지낸다. 그렇게 열어 놓기만 해도 시원하던 때였다.
열린 창문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팔 베개를 하고 여름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나는 자리를 박 차고 일어 난다. 뭉개 구름이 만들어 내는 그림 보기도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소리를 따라 창문 너머 방안을 쳐다본다. 우리 반 남희가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있다. 평소 같으면 놀리고 장난치는 남희는 꽤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피아노에 열중하고 있다.
우리 집 바로 정면에서 보이는 집이다. 그 집을 부를 때는 남정이네라고 부른다. 남정이는 남희의 언니 이름이다. 우리보다 두 학년이나 높다.
누나가 없다. 누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와 남정이 누나네 어머니는 고향이 같다. 그래서인지 그 집으로 심부름을 자주 간다.
동생들을 시킬까! 어림없다.
늘 심부름은 내가 한다. 접시를 들고 녹두 빈대떡을 가져다준다.
가끔 남희가 나와 받아 줄 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돌아온다. 갔다 와서 까닭 없이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려 보지만 소용이 없다. 심부름은 늘 내 몫이다.
피아노를 치는 남정희를 본다. 소리가 좋아 쳐다본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린 남희가 혀를 내밀고 다시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친다.
순간 나도 주먹을 불끈 쥐며 남정이를 향해 흔들어 댄다. 그렇지만 피아노 선율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홀라당 빼앗기고 멍하니 그곳에 서 있다.
물렁 물렁한 고무공이 관자 놀을 때리고 통통 튀어 간다.
이제 슬슬 공놀이를 다시 시작한다. 모두 몸에 땀이 식었다. 피아노 소리에 그만 공놀이도 재미없다.
인원이 빠지면 공놀이 하기 힘들다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원철이 녀석의 소리를 뒤로 하고 철제 대문의 반쯤 열린 작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여름 한낮의 동네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그늘에 자리 잡은 평상에는 어머니들이 과일이랑 옥수수를 들고 나와 연신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힌다. 그러니 자연 동네에 문을 꼭 걸어 잠그는 집이 없다.
마당에 바둑이가 나를 보고 어쩔 줄 모른다. 반가워서다. 지금은 반려견이니 동물 학대니 하여 개도 사람의 인격이 있는 것처럼 다루고 옷도 입히지만 50여 년 전에 개는 진짜 개처럼 다루었다.
아직 씻지 않은 손으로 개 목걸이를 풀어 준다. 이 녀석은 내 옆구리에 앞다리를 올리고 놀자고 장난을 건다. 나는 씻고 집에 들어가 여름 방학 숙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바둑이와 놀기 시작한다.
방안에 있기 답답해하던 여동생이 엄마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와 함께 개랑 놀고 있다.
남동생 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어디 또래 친구 집에서 만화책 보고 있나 보다.
어머니의 힘찬 목소리가 들린다.
"개하고 그만 놀아라! 씻고 숙제 안 해?"
목소리 속에는 이놈에 자식 오늘 하루 종일 놀기만 하고 공부는 안 하느냐 하는 뼈 있는 그러나 톤 낮은 강한 어조의 목소리 이시다.
움찔 놀라며 괜히 애꿎은 여동생에게 화를 낸다. 여동생은 입을 삐죽거리며 엄마 슬리퍼를 힘겹게 끌고 마루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간다. 물론 슬리퍼는 물 때문에 젓어 있고 마루에는 여동생의 작고 앙증맞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꼬질 꼬질한 땟국물과 함께.
'이크 큰 일이다. 이 일을 어쩌지!'
결국 여동생은 야단을 안 맞는다. 온통 혼나는 것은 바로 나뿐이다.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물을 들고 머리를 수도 꼬지에 갖다 댄다. 신원한 물줄기가 머리와 목을 타고 얼굴을 적시고 흘러내린다. 대충 그렇게 씻고 마루에 걸려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마루 바닥에 있는 걸레를 손에 쥐고 훔치며 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온다.
그 사이 여동생은 마루와 방을 지나면서 젓었던 발에 물기를 다 날렸다.
오빠가 바닥을 훔치든가 말던가 실컷 개랑 나랑 놀고 나서 혼자 인형 놀이하고 있다. 아직 6살짜리 아이가 인형은 아기가 되고 지는 엄마가 되어 노는 모습이 귀엽다.
바가지 머리 모양을 해가고 다리 벌리고 앉아 노는 모습이 재미있다.
이 정도면 어머니에게 혼날 일은 없다. 얼른 상을 펴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방학 숙제 과제물을 펼치니 아침부터 점심 먹고 놀았으니 책상머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남희는 아직 피아노를 치고 있나 보다. 그 피아노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린다.
나는 돗자리에 스르르 쓰러져 잠이 든다.
날개를 단 예쁜 천사가 마법의 지팡이로 방학 숙제를 해 주는 꿈을 꾼다. 나는 예쁜 천사의 얼굴과 마법 지팡이가 저절로 해 주는 숙제를 감탄하는 꿈을 꾸고 있다.
뭔가 머리에 툭툭 와 닿는 것이 있다. 가는 대나무로 만든 먼지떨이로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리고 있는 남동생 녀석의 얄미운 얼굴이 보인다. 예쁜 천사는 어디론가 떠나가고 얄미운 동생 놈이 나를 깨운다고, 그것도 먼지떨이로 건드리고 있다. 아 바로 한 살 밑의 동생의 나의 원수다. 늘 나를 괴롭히는 역할만 한다.
한 손에 삶은 옥수수를 하모니카 불듯이 하며 오물작 오물작 먹고 있다.
어머니가 옆에서 수박을 자르고 계신다.
"그렇게 아침부터 놀기만 하니 잠이 오지 잠이 와 이놈아! 얼른 먹고 오늘 할 숙제마저 해!"
'아~ 야속타 왜 여름 방학이면 놀지 못하게 학교에서는 숙제를 내어 줄까 싫다 싫어!'를 연신 마음속으로 내뱉는다.
아직도 앞 집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아까 보다 훨씬 선율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을 보니 남정이 누나가 피아노를 치는 모양이다.
수박과 옥수수를 먹으며 피아노 소리를 한 참 듣고 있다. 뭔지는 몰라도 좋다는 느낌은 있었다.
"어머~니이~"(초등학교 이학년이 조숙했다.)
어머니는 부드럽고 다정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의 어머니!
"나도 피아노 배우로 싶은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괜한 말을 했다 생각하는 순간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열심히 할 수 있겠니? 그렇지 않아도 가르쳐 볼까 하고 있었는데...."
역시 어머니도 말 끝을 흐리셨다.
"네! 어머니 잘할 수 있어요. 열심히 할게요!"
어머니는 어서 간식 먹고 숙제부터 하라고 하신다. 벌써 밖은 해가 넘어가는지 창문 밖에는 하늘이 불타오르는 듯 색이 선명하다.
이제 남정이 누나 집에 피아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골목에 친구들 노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서 창가를 통해 불어오는 가녀린 여름 저녁 바람이 더위를 식혀준다.
그렇게 긴긴 여름날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