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연작 1: 의외로 담백한 시금치 키쉬
생애 첫 번째 경험이란 떨릴 수밖에 없는 것. 이번의 키쉬 만들기가 딱 그랬다.
키쉬를 처음 먹어본 것은 2009년 2월, 첫 유럽여행에서였다. 2009년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덜 '스마트'했던 시절이었고, 유럽여행에 관련한 정보가 지금처럼 들끓듯이 흔하지는 았았다. 난생처음 배낭여행을 가게 된 여행 초짜는 여행책 한 권과 프린트 몇 장을 챙겨 들고 여기저기 블로그에서 주워 모은 헐렁한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고서, 불안한 마음으로 20일이 넘는 겨울 유럽 여행길에 올랐더랬다.
정작 어느 나라를 방문할 지도 제대로 정하지 못했던 허술한 준비과정에서, '키쉬'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왜 그렇게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 학교 도서관 컴퓨터 앞에 앉아 나름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하며 건져낸 프랑스의 먹을거리 정보는 지금은 아주 상식적인 것들이었다. PAUL에서 맛있는 빵과 커피 먹기, 라뒤레 마카롱, 뺑 오 쇼콜라, 홍합요리, 에스카르고, 샹젤리제 거리 근처의 스테이크, 다양한 요거트들...'키쉬'는 지금도 그다지 'Must eat' 목록에 올라오지 않는 요리인데, 어째서인지 그 발음이 짝짝 달라붙었다. 키쉬. 파이 반죽에 각종 채소와 햄, 크림과 치즈를 넣고 노릇하게 구워내는 식사용 파이. 대체 어떤 맛일까?
공교롭게도 In-Out 도시가 모두 파리였고, 파리에 도착한 첫날에 바로 키쉬를 맛보게 되었다. 출출하던 차에 용기를 내서 숙소에서 빠져나와 근처의 Monoprix를 구경하게 된 것이다. 함께 도착한 친구들은 빵이며 요거트 같은 것들을 구경했다. 항상 그렇듯 거의 모든 제품을 천천히 스캔하던 나는 외마디 기쁨의 비명을 지르게 된다. 다. 냉장고에서 인스턴트 키쉬를 발견했던 것이다. "키쉬다 키쉬!" 친구들은 호들갑을 떠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뭔데?" "몰라. 파이 뭐 그런 거? 여하튼 맛있대!"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친구들의 반응에 잠시 의기소침했지만, 나는 햄이 들어간 것, 들어가지 않은 것 해서 키쉬를 무려 두 조각이나 산 후에 룰루랄라 호텔로 돌아왔다.
나이가 어려선지 기력이 충만했던 우리들은 첫날부터 잠을 잘 생각도 하지 않고 과자며 요거트며 간식거리를 바닥에 늘어다 놓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하지만 내 키쉬에 대한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접시도 없이 비닐팩을 턱 벗겨놓은 모양새가 허접하기는 했다. 무엇보다도 모노프리에서 정신이 없어서 키쉬를 전자레인지에 너무 오래 돌려버렸는데, 그 비닐팩마저 볼품없이 쭈글쭈글 줄어들어버렸다. 두 개나 샀으니 어서 먹어보라는 적극적인 권유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내가 산 키쉬에 손도 대지 않았다. 겨우 한 입 맛본 친구가 하는 말. "이거 비닐이 녹아서 플라스틱 맛이 좀 나는데?" 결국 그 이후로 친구들 중 누구도 내 키쉬에 손을 대질 않았고, 나는 "이거 원래 맛있는 건데-"를 중얼거리며 키쉬 두 조각을 혼자 먹어야 했다.
이 어설픈 키쉬와의 조우 이후에 키쉬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약 2년 후 미국에서 친한 친구의 프랑스인 친구를 만나 진짜 키쉬를 맛볼 수 있었다. 바삭하고 고소한 타르트에 전자레인지가 아닌 오븐에서 구워 따끈하고 부드러운 크림 필링. 베이컨의 고소 짭짤한 맛. 맛이 너무 좋아서 친하지도 않던 그 프랑스인 앞에서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 너무 맛있어! 이에 그는 프랑스 억양을 섞어 손바닥을 위로하고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을 하며 쿨하게 대답했다. "It's nothing~ so easy!"
So easy? Nothing?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 일단 키쉬를 만들려면 파이 반죽부터 준비해야 되고 무엇보다 오븐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의 "So easy" 발언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키쉬도 추억으로만 남겨두었다.
그러던 중, 오븐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지자 머릿속에 스르륵 떠오른 생각 하나. 키쉬를 구워봐야겠다. 기억이란 은근히 생존력이 강한 것이 잊은 듯해도 잊게 되는 것이 아니어서, 그 생각이 든 이후로는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코스트코에서 큰 맘먹고 대용량 크림도 사고 치즈도 샀다. 시금치 한 단이 천원인 걸 발견하자, 재료도 다 모였겠다 지체 없이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요리로 넘어가기에 앞서, 잠시 키쉬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정리해보려고 한다.
키쉬(quiche)는 전형적인 프랑스 요리로 알려져 있지만 그 어원 자체는 오히려 독일어에서 근거했다는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 키쉬에 관한 첫 영어 기록은 1805년, 프랑스어 기록은 1605년의 것이 남아있으며 그 어원은 '케이크' 또는 '타르트'를 의미하는 독일어 '쿠헨(Kuchen)'이라고 한다.
어원뿐 아니라, 그 요리법까지 프랑스가 원조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키쉬의 기본은 오목하게 구운 페이스트리에 크림+달걀 또는 우유+달걀로 만든 커스터드 필링을 넣고 오븐에 구운 것이다. 바로 이 요리법이 최소한 14세기에는 영국 곳곳에 퍼져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14세기의 영국 요리서 "The Forme of Cury(요리의 방법)"에도 페이스트리에 커스터드와 고기나 생선, 과일 등을 채우고 오븐에 구운 요리가 "Crustarde"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유럽 및 영미권에 널리 퍼진 요리인만큼, 키쉬에도 다양한 레시피가 존재한다. 페이스트리 반죽과 크림과 달걀로 만든 커스터드는 키쉬의 변치 않는 기본. 레시피 간의 차이는 주로 내용물로 무엇을 넣느냐의 차이이다.
- 키쉬 로렌(Quiche lorraine)
프랑스의 로렌(Lorraine)이라는 지역명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요리이다. 프랑스의 염장 돼지고기 라흐동(lardon)이 속재료로 들어가는데 영미권에서는 이를 자연스럽게 베이컨으로 대체한다.
-키쉬 프로방살(토마토 키쉬, Quiche provençale)
라따뚜이로 유명한 프로방스 지역답게, 프로방스의 키쉬에는 토마토가 잔뜩 들어간다. 경우에 따라 라따뚜이처럼 쥬키니를 토마토와 함께 넣기도 한다. 어찌 보면 피자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 인접한 이탈리아의 영향도 조금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키쉬 바닥에 머스터드(디죵 머스터드나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잔뜩 바르고 토마토와 바질 등의 허브를 가득 채우는데, 머스터드와 토마토의 새콤한 맛이 커스터드의 무거움을 잡아주어 입게 계속 들어가는 마력이 있다.
-키쉬 플로렌틴(시금치 키쉬, Quiche florentine)
시금치와 스위스 치즈가 들어가는 시금치 키쉬에 '플로렌틴)'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나름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이탈리아에 플로렌스(우리나라에는 피렌체나 투스카니라는 지명으로도 잘 알려진 지역) 지방에서 자란 프랑스의 왕비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가 바로 그 사연의 주인공이다. 그녀의 삶은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운데, 시집을 온 프랑스 왕가에서는 그녀를 상인 집안의 딸이라고 무시했으며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남편의 사후 아들은 그녀의 조언을 무시하기만 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가 죽은 직후에 그 아들인 앙리 3세는 지지세력이나 자손이 없이 사망하였고, 발루아 왕가가 막을 내리고 부르봉 왕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렇듯 개인적인 삶은 기구했으나 그녀가 프랑스 왕가의 일원이 된 것은 프랑스 문화에 큰 씨앗이 되었다. 유명한 마카롱이 사실은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과자라는 것은 꽤 알려진 사실인데,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바로 이탈리아 과자인 마카롱 레시피를 프랑스로 가져온 주인공이다. 심지어 프랑스는 16세기 중반까지 시금치를 식용하고 있지 않았는데 시금치 씨앗을 이탈리아에서 가져와서 시금치를 사용한 레시피를 널리 퍼뜨린 사람도 바로 이 카테리나 데 메디치이다. 그녀가 도입한 시금치 요리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시금치는 '플로렌스의 채소'로 알려지게 되었고, 시금치가 들어간 요리에 '플로렌스의(florentine)'이라는 어구가 붙게 되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향수를 사용하지 않던 프랑스 궁정에 향수 문화를 도입한 것도 바로 그녀라고 하니, 현재 향수 사업의 중심이 되어버린 프랑스의 위치를 생각하면 프랑스 향수회사들은 그녀를 만나면 엎드려 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기구한 운명의 카테리나 데 메디지가 프랑스로 가져온 요리, 시금치 키쉬에 정면 도전하기로 한다!
정말 프랑스 친구의 말대로 아무것도 아닌(nothing) 쉬운(easy) 요리일까?
재료.
<파이지 재료>
다이소 2000원짜리 하트 모양 파이 틀 X 2 개 기준 (하나는 호두파이, 하나는 키쉬를 구움)
밀가루 1 ¼ 컵 (150 g)
소금 1/2 티스푼 (2.5 ml)
차가운 (무염) 버터 ½ cup (150 g). 미리 작은 큐브로 자른 후 냉동실에서 살짝 얼리기
달걀 1 개
얼음물 2 티스푼 (30 ml)
<필링 재료>
다이소 2000원짜리 하트 모양 파이 틀 X 1 개 기준
버터 0.5 테이블스푼 (15 g)
다진 양파 반 개
소금 한 꼬집, 후추
달걀 4개
크림 1/2 컵 (120 ml)
소금 0.5 티스푼
카옌페퍼, 넛맥 한 꼬집씩
그뤼에르 치즈(그라나 파다토 치즈로 대체) 1/4 컵
시금치 1/2 단
조리법.
1. 버터는 작은 큐브로 썰어 냉동실에서 살짝 얼려둔다.
2. 푸드 프로세서나 믹서에 밀가루, 소금, 차가운 버터 큐브를 놓고 갈아서 잘 섞는다. 버터가 작은 알맹이로 갈아져서 질감이 축축한 모래 같은 질감이 되면, 달걀 1 알을 넣고 다시 믹서를 돌려 반죽한다. 반죽의 점도를 보고 필요하면 차가운 물을 더 섞는다.
원래 파이지를 만드는데 달걀이 필수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첫 도전이고 파이지가 무너지는 것이 걱정되어, 실패할 일이 없어 보이는(foolproof) 레시피를 찾다 보니 이 반죽법을 사용하게 된 것. 결과적으로 튼튼하지만 바삭한 맛있는 파이지가 완성되었다.
3. 글루텐을 활성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반죽은 모양이 잡힐 때까지만 한다.
4. 밀대로 파이 반죽을 넓게 편 후에, 다시 밀대에 반죽을 살짝 감아 그것을 파이팬 위에 굴려 펼치면서 반죽의 자리를 잡는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구석구석 손가락으로 꼭꼭 눌러준 후, 포크로 바닥에 구멍을 찍어준다. 파이 모양이 잡히면 비닐봉지로 싸서 냉동실에 살짝 넣어준다.
5. 키쉬 필링을 준비한다. 버터를 넉넉히 두른 팬에서 양파가 황금색이 돌 때까지 볶는다.
6. 깨끗하게 씻은 시금치를 넣고 시금치가 다 익을 때까지 볶는다.
6. 달걀, 크림, 소금, 후추, 카옌페퍼, 넛맥을 거품기로 섞어 커스터드 필링을 만든다.
7. 냉동실에 있던 파이 반죽을 꺼내 220도로 예열한 오븐에서 5~7분간 굽는다. 다 익힐 필요는 없고 지켜보다가 살짝 노릇해지면 바로 꺼내면 된다. 필링이 들어가도 눅눅하지 않고 바삭한 파이 크러스트를 만들기 위한 방법.
사실 알루미늄 포일이나 유산지를 깐 후 말린 콩 같은 것을 올려 반죽이 부풀어 오르지 않도록 눌러서 굽는 것(blind baking)이 제일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미 파이 반죽을 처음 해서 멘붕 한 내가 알루미늄 포일이니 콩이니 하는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될 대로 돼라 하고 파이 반죽을 그대로 오븐에 넣었는데, 의외로 거의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오예!
8. 오븐에서 빼낸 파이 반죽은 조금 수축해 있는 것이 정상. 그 위에 치즈를 갈아 올리고
9. 시금치와 양파를 고루 올린 다음 커스터드 필링을 얹고 다시 치즈를 뿌렸다.
10. (9)를 325도의 오븐에 넣도 30분~40분 정도 익힌다. 키쉬의 크기에 따라, 오븐에 따라 익는 시간이 차이가 있으므로 표면은 너무 익었는데 속이 아직 물렁하다 싶으면 온도를 낮추어 더 익혀준다.
11. 키쉬를 흔들어 보았을 때 필링이 꿀렁꿀렁하지 않으면 다 익은 것이다!
파이 크러스트 반죽부터 커스터드 필링까지. 생소한 것 투성이어서 정신이 없었던 내 첫 키쉬.
이 작은 것을 하나 만든다고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파이 반죽이라는 것, 해보고 나니 별것 아닌데 처음에는 모래 알갱이 같은 질감이니 너무 뭉치면 안 된다느니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버터향이 고소하고 바삭바삭하고 튼튼한 나의 첫 파이 크러스트. 요것만 뜯어먹어도 될 정도로 정말 맛있었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커스터드 필링도 부드럽고 고소하다.
사실 마냥 느끼할 줄만 알았는데 시금치와 양파를 가득 넣어서인가, 부담스러운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먹어본 친구의 말로는 분명 먹으면 살찌는 건 알고 있는데 어딘가 건강한 맛이라 계속 속임을 당하는 느낌이라고.
맛은 이 정도면 만족스러우니 이제 이것이 쉬웠느냐, 어려웠느냐 하는 총평이 남는데...
사실, 쉽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큰소리쳤던 프랑스 친구의 말과는 달리, 첫 도전에 레시피를 다시금 찾아가며 허덕이고 긴장해서 만들고 나니 녹초가 되긴 했다.
다시 도전할 것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예스!
맛도 맛이겠거니와 만드는 재미가 장난이 아니다. 이제는 자신감이 붙어 다음 키쉬는 더욱 즐기며 만들 수 있을지도!
Bon Appet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