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랑일랑 Mar 12. 2017

젊은 자취생의 그릇덕후로서의 초상

자취방에서 차곡차곡 키워나가는 그릇 수집가의 꿈

언제부터 그릇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따지자면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미취학 아동이던 어린 시절에 친구의 잘 빠진 플라스틱 소꿉놀이 세트를 보며 입맛을 다셔보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


그 시초가 언제이건 나는 그릇을 좋아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릇 수집이 먹는 것과 꾸미는 것, 예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거치는 취미라고는 해도 나에게는 그 열망이 확실히 좀 일찍 찾아온 감은 있다. 바로 3~4평 밖에 안 되는 좁다란 자취방에 살며 학교와 집, 회사와 집을 오가던 시절에도 감히 그릇에 대한 욕심을 품고 있었던 것.


보통 인터넷에서 그릇 정리를 한다며 자신들이 수집한 그릇에 대한 포스팅을 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뜰하고 깔끔한 신혼 n년차 주부나 연륜과 자본력이 묻어나는 50대 부자 아주머니가 대부분이 아니던가? 전자의 경우는 무인양품 그릇장 같은 깔끔한 디자인의 원목 그릇장에 덴비며 르쿠르제며 이딸라, 폴란드 그릇 같은 그릇들을 종류별로 아기자기하게 모아놓고 트렌디한 음식을 차려먹는 데 사용하기 마련이다. 후자의 경우는 광활하다시피 한 붙박이 그릇장 혹은 세월 깊은 앤틱 그릇장에 로열 코펜하겐, 빌레로이 앤 보흐 등 유럽 브랜드부터 이름도 외우기 힘든 앤틱 그릇들을 공작이 꼬리 깃털을 펼치듯 찬란하게 진열하는 것이 클리쉐.


그렇다면 자취생 그릇 수집가로서 나의 정체성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릇 하나당 3만 5천 원을 심리적인 마지노 선으로 두고 그 가격 이상의 그릇은 되도록 구입하지 않는 것? 그릇을 하나 살 때마다 좁은 수납공간 걱정을 먼저 한다는 것? 아무래도 제대로 된 집과 가정이 있는 대부분의 그릇 수집가들과는 달리 조금 짠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재미 삼아 나의 그릇 수집 패턴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나의 그릇 수집 패턴>


1. 그릇 하나당 가격은 최대 3만 5천 원을 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 가장 비싼 그릇은 소셜 초특가 할인 때 3만 4천 원을 주고 산 로열 코펜하겐 빈티지 꽃무늬 접시이다. 최근에 신세계백화점에서 '후첸 로이터'라는 브랜드를 알고 엄청난 구매 욕망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마음을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심리적 마지노선 때문. 그 기준이 어째서 3만 5천 원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내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녀석의 가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2. 제대로 된 세트가 하나도 없다.

1인 가구이자 사회초년생으로서 그릇을 세트로 살 유인은 전혀 없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다. 같은 접시를 3,4 개 살 바에는 아주 다른 디자인의 접시를 더 사는 것이 아직 나의 구미에 더 맞다. 다만 정말 마음에 들어서 다른 색상으로 각각 하나씩 갖고 싶은 경우가 있어 1 쌍을 이루게 된 접시들이 몇 개 있기는 하다.


3.  백화점 매장을 이용하지 않는다.

월급이 많지 않고 자취생활 때문에 나가는 고정비가 큰 고로 가격 비교 없이 바로 구매하는 것은 나의 생활수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이다. 해외 유명 브랜드(대표적으로 덴비)는 무조건 배송비 및 쿠폰 할인까지 전부 대입하여 인터넷 최저가 상품을 골라서 구매한다. 광주요 같은 한국 브랜드 도자기는 오프라인 매장의 연말 할인, B급 제품 할인 이벤트 등을 통해 구매한다.


4. 다이소나 버터 등 저가 생활매장 상품을 애용한다.

보통의 그릇 수집가라면 다이소나 버터 같은 매장의 저렴한 제품들에 그다지 큰 애착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취생 그릇 수집가라면 다이소 접시에 대한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요즘엔 다이소 그릇도 꽤나 디자인이 세련된 것이 많아서 만 원에 크고 작은 그릇 한 바구니를 업어올 수 있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이런 그릇들의 가장 큰 장점은 흠집 나는 것, 떨어뜨리는 것 걱정 없이 마음껏 사용하기가 쉽다는 점이다.


5. 그릇 수납공간은 항상 모자란다.

3~4평짜리 원룸에 살 때는 정말 눈물겨웠다. 책상, 책장, 침대, 서랍 하나, 전신 거울 하나, 옷걸이 하나를 세워놓고 나면 사람 두 명 앉을자리도 없던 눈물 나게 좁고 습하고 어둡던 그곳. 부푼 마음에 새로 산 그릇을 품에 안고 집으로 와도, 이내 안전하게 이들을 모셔둘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로 상자에 넣어 침대 밑 공간에 쑤셔 넣기 일쑤였다. 보다 큰 집으로 이사 가면 반드시 이 그릇들을 꺼내어 보며 노는 재미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8평이 좀 넘는 원룸으로 이사를 왔어도 수납공간이 모자라기는 매한가지. 붙박이 찬장이 합판으로 만든 뒤판에 본드와 나사 몇 개로 받침을 박아 만든 허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그릇 진열의 꿈은 더욱더 멀어졌다. 이미 둘 곳이 없던 책을 한껏 쌓아두었던 붙박이장 맨 아랫칸은 어느 한순간 끼익 소리를 내더니 시멘트 바닥에 닿도록 무너져 꺼져버렸고, 그 윗칸도 불안함은 말할 것 없는 상황. 한달음에 책꽂이를 따로 하나 사서 책과 무거운 그릇을 피신시키기는 했지만 책과 화장품, 그릇이 뒤엉킨 책장이라니, 일관성이 없어 그릇 진열이나 인테리어로는 꽝이다.



문제의 붙박이장. 쓸데없이 유리로 받침을 해놓아서 무거운 제품을 올릴 수도 없고 무엇보다 저 안쪽 뒷면이 판자 조각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조금씩 무너지고 있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갖고 있기 애매한 책은 모조리 버려버리고 간신히 책장 한 칸을 비워 무게가 나가는 그릇들을 겹겹이 쌓아올렸다. 바로 윗층은 화장품 층. 그 윗층은 책장층.






자취생 그릇 덕후로서 위와 같이 약간의 제약 상황이 있기는 하지만, 그릇과 요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 못지않다고 자신하는 바이다. 마침 최근 제대로 정리를 해두지 않아서 엉망진창인 그릇 정리 상태가 마음에 걸려 정리를 하게 된 김에 종류별로 팀을 나누어 사진을 찍어보았다.





1. 덴비 그릇들.


내가 그릇 수집계에 입덕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덴비.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임페리얼 블루 시리즈의 영롱한 푸른빛에 반해서 덴비 그릇을 구매했다가, 그 쨍한 색에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헤리티지 시리즈로 넘어간 경우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덴비를 정말 좋아해서 소셜 앱을 깔아 두고 항상 '덴비 핫딜'을 찾아보곤 했는데 요즘엔 영 그 열정이 사그라들었다. 아무래도 덴비보다는 손맛이 더 느껴지는 국내 작가들의 그릇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서 그런가 보다. 덴비 특유의 테두리 디자인이 이제는 좀 지겹게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그릇계에 입덕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중앙의 파란 테두리 그릇. 니머지는 전부 헤리티지 라인.


덴비 그릇의 강점은 아무래도 그 단단함과 견고함. 웬만하면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이 정말 마음에 든다. 다른 그릇에 비해 덴비 그릇은 비교적 막 쓰는 편인데 아직 이가 나간 그릇이 하나도 없다. 이것저것 아무 라인이나 마음대로 골라 모아도 덴비 그릇들 사이의 색의 조화가 그럭저럭 볼만하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이다.



덴비 특유의 물바른 듯한 반짝임이 좋다.


외국 브랜드치고 한식에 잘 어울리는 편이기에 덴비가 국민 신혼 그릇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덴비 접시는 서양요리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파스타나 라자냐, 브런치 플레이트로 사용하기 좋은 그릇이다.



브런치 플레이트로도 괜찮고,




라자냐를 담아도 잘 어울리고


그리스식 라자냐 무사카와도




파스타와도 잘 어울린다.



편안한 느낌의 헤리티지 라인과는 달리 임페리얼 블루는 확실히 이국적인 맛이 있다.





2. 한국 그릇들.


요즘 내가 가장 열광하고 있는 그릇은 국산 그릇들이다. 브랜드나 작가별로 특징이 있을뿐더러, 자세히 살피면 같은 그릇도 모양이나 색감, 유약 발림에 차이가 있어서 나만의 그릇을 하나 골라드는 기쁨을 즐길 수 있다.


최근에 많이 구입하게 된 것은 광주요의 그릇들. 기본적으로 가격이 크게 비싸지 않을 뿐 아니라 연말 할인 및 B급 할인 등 할인 이벤트가 많아서이다. 내가 갖고 있는 광주요 그릇은 전부 삼청동의 광주요 매장에서 샀다. 이도자기의 그릇들도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광주요보다 두께감이 있고 묵직해서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물론 이도자기 제품이 광주요만큼 할인을 한다면 당연히 구입할 마음이 있다! 번번이 기회를 놓쳐서 그렇지...



요즘 브런치 플레이트로 많이 쓰는 오른쪽 아래의 큰 접시 두개는 모두 광주요 그릇들.


판교에 친한 친구가 살고 있어, 그릇 덕후들의 성지 판교 그릇 거리를 구경할 일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화소반, 문도방 같은 브랜드의 그릇은 가격대가 나의 마지노선을 심히 뛰어넘는 고로 갖고 싶은 마음은 꾹 참고 감탄하며 구경만 해야 했다. 내가 구매한 첫 판교 그릇은 '디자인도씨'라는 도예공방에서 산 것들인데 마침 판교 시민 축제의 알뜰 장터에 좋은 제품이 싼 값에 나와 기쁜 마음으로 3개나 장만했다. 아래의 삼색 국그릇과 네모난 그릇, 밤톨 같이 생긴 무광 그릇이 바로 내 첫 판교 그릇들이다.


이외에도 자주JAJU나 백화점 9층의 매장에서 가격대가 괜찮은 제품이 있으면 지나가다 그때그때 하나 둘 사는 편이다.



왼쪽 뒷편의 네모그릇, 밤톨 그릇, 삼색 밥그릇은 모두 판교 그릇 거리에서 싸게 구입한 것.




판교에서 특템한 밤톨그릇은 어떤 요리를 올려도 그림 같아 보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광주요에서 산 요 올리브색 그릇은 나름 높이감이 있어 국물이 자작한 요리도 담을 수 있어서 좋다.




마찬가지로 광주요에서 산 이 그릇은 넓직하고 깔끔한 디자인이라 어디에나 잘 어울린다.




백화점에서 1만7천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구매한 이 그릇은 접시로도, 그릇으로도 사용하기 좋은 팔방미인이다.




흰색 접시가 차분하고 깨끗한 느낌이라면 세트인 이 회색 접시는 어딘가 도시적이고 세련된 느낌이다.




판교 '디자인도씨'에서 구입한 그릇 삼총사들. 은근히 서로 잘 어울린다.




3. 일본 그릇들.


일본의 그릇이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올해 초의 오키나와 여행 덕택이다. 20대가 되어 일본에 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오키나와 여행을 통해 일본요리와 일본 그릇에 눈을 떴던 것이다. 일본 다이소에서 하나에 108엔 하는 그릇들을 보고 기쁨에 오열하였던 것도 추억 중 하나. 아래 접시 중 꽃무늬 접시 3세트와 흰색 프랑프랑 사발을 제외한 나머지 접시는 모두 108엔에 오키나와 다이소에서 집어온 것들이다. 가격이 믿기지 않아 짧은 일본어로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모른다. "혼또니 햐쿠하치엔 데스까? 혼또 데스까???"




일본에서 산 그릇은 아무래도 일본요리에 잘 어울린다. 일본 요리를 만들 때면 항상 일본에서 산 이 그릇들을 생각하며 요리하게 된다.


오키나와 가정식 메뉴 후 참푸르.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은 있어서, 작은 그릇에 깍두기 한 조각이라도 올려놓고 소꿉놀이하듯 일인상을 차리는 것도 재미있다.


오키나와 다이소 쇼핑 덕에 이렇게 소꿉놀이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4. 다이소 및 각종 디자인 샾 저렴이 그릇들.


자취생의 그릇 인생을 다이소를 제하고 논할 수 있으랴. 다이소 접시도 자세히 살피면 괜찮은 디자인이 많아서 의외로 잘 활용하게 된다. 다이소 외에도 코즈니, 버터, 자주JAJU 등 국산 리빙 매장이 많이 있어서 재미있고 귀여운 상품들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이소, 버터, 코즈니, 자주JAJU 매장에서 그때그때 사모은 그릇들.


이 다이소 접시는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의외로 유럽 분위기가 확 나는 신기한 접시이다. 요즘에는 이 회색 대신 비슷한 그림의 파란색 프린팅이 찍힌 접시를 파는 것을 보았다.



코즈니에서 산 이 나뭇잎 접시는 동남아요리를 담기에 딱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동남아풍 요리가 아니면 어울리는 요리가  잘 없다. 팟타이를 만들었던 건 순전이 이 접시를 위해서였다.





다이소에서 산 요 귀여운 접시는 디저트류나 빵을 담기에 딱이다.




마찬가지로 다이소에서 산 파스텔톤 나무접시도 빵이나 케익, 티푸드를 담는데 적절히 활용할 계획이다.



5. 유럽 그릇들.


내가 가진 유럽 출신 그릇 중 유명 브랜드 제품은 유명한 뵝앤그랜달 블루 시걸(Blue Seagull) 접시와 커피잔, 로열 코펜하겐 빈티지 꽃 접시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년 여름 스페인-남프랑스 여행에서 얻은 그릇들이다. 사실, 그릇 때문에라도 유럽여행을 한번 더 가고 싶다. 27인치 캐리어와 배낭 한가득 깨질세라 최선을 다해 가져온 그릇이 저 정도이지만 고심하다 하나, 둘 사지 않고 놓아버린 접시들이 요즘도 가끔 떠오를 정도이다.



위에서 딱 내려다 보아도 스페인 접시에서 산 접시와 프랑스에서 산 접시가 확연히 달라 보인다.




하나하나 여행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그릇들.




아를의 빈티지 가게에서 4유로를 주고 산 이 접시는 너무너무 귀엽고





톨레도에서 17유로를 주고 산 이 접시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정말 매력적이다. 이 접시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라도 쿠스쿠스 같은 새로운 요리에 도전할 수 밖에 없다.




마드리드의 왕궁 기념품 샵에서 산 접시. 흔히 볼 수 없는 색감의 프린팅이 정말 예쁘다. 세트로 하나 더 사올 것을.. 항상 후회하는 녀석 중 하나.




나름 비싸게 구입한(그래봤자 3만원 대) 이 블루시걸 접시는 이외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 연청의 애매한 색감과 어울리는 메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나의 덕심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 어딘가 불편해서 미루고 미루었던 포스팅이 바로 오늘의 포스팅이다.


이 글을 여기까지 마무리하게 한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은 아무래도 나의 그릇 덕심이지만, 대외적으로도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있다. 바로, 자취생도 그릇을 사랑하고 수집할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이다.


사실 '자격' 운운을 할 필요도 었다. 비록 우리 자취생들에게 수납공간과 경제적인 부담감의 제약은 있을지언정, 그릇에 대한 사랑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냉장고 재료로 뚝딱, 푸짐한 닭고기 스키야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