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는 통하는 게 있어서 서로 다른 공간에 있어도 무언가를 함께 느낀다는 *괴담이 있는거로 알고 있다.
그에 앞서 성격이나 외모가 일정부분 닮아있다는 *헛소문도 들었다.
(*저에게는 그렇단 얘기입니다.)
앞서 느꼈겠지만, 나는 그와 그렇게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어릴 때 싸웠던 기억과 놀았던 기억은 9:1로 큰 편차가 있고, 청소년기엔 그마저도 10:0으로 갈무리한다. 그 역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침에 각자 방문을 열면서부터 서로 째려보기 시작했다는 엄마의 회고를 통해 그랬나보다 짐작할 뿐이다.
그와 함께여서 싫긴 했지만 그게 엄청난 고민이 됐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중심엔 나의 적대심을 존중해준 엄마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날한시에 태어난다는 쌍둥이는 사실 동시에 태어나진 않는다. 허허,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겠지만, 5분의 시간차는 지독하게도 나를 따라다니며 2군으로 몰아냈기에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짚고 싶었다.
출생시, 그는 나보다 5분 일찍 달려나왔다고 한다. 그에 비해 나는 누가 끌어줘야 따라오는 것처럼 느릿느릿 나타났다. 마치 나오기 싫다는 애처럼. 그러고선 숨을 안쉬었고, 파래졌고, 그런 나를 두고 퇴근하겠다는 의사의 멱살을 아빠가 잡아끌고와 겨우 살아났다는 탄생전설을 가진 나다. 1kg이랬나. 내남편이 한끼만 굶어도 빠지는 1kg이 당시의 나다.
그래서 어쨌든 5분 늦게 태어나 동생이 되었다.
내가 열이 뻗쳐 "야!"라고 할 때면 어김없이 엄마에게 혼이 났다.
"너 오빠한테 누가 야라 그래~"
이렇게 억울할 수가.
그는 엄마의 잔소리에 메아리를 더했다.
"느 으쁘흔트 느그 이으르 그르으~ 낄낄낄"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다.
"미국에서는 늦게 태어난 사람이 위야!"
"여기가 미국이냐? 하이~~ 하이~~~ 하이~~~~ ㅋㅋㅋㅋㅋㅋㅋ"
'지금은 집에 화장지가 없는 시즌이니 달력을 찢어서 비빈 다음에 저새끼가 자는 틈을 노렸다가 콧구멍이 쑤셔 넣으면 되겠다. 양 쪽 콧구멍 모두 해야 하는 걸 잊지 말아야해.' -나의 데스노트 中
엄마는 나를 미국에서 낳아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내 편이 되어주셨다. 다만,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방식보다는 그를 줘패버리는 방식을 선호하셨을 뿐.
나은 형편을 위해 아끼고 아끼는 삶을 사셨던 엄마는 학업만큼은 엄청난 열의가 있으셨다. 아끼면서 둘의 공부를 시킬 수 있도록 선택한 방법은 하나의 학습지로 둘을 가르치는 거였는데 순서는 당연히 장남이 먼저였다.
그가 먼저 풀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아이템풀, 얘가 백점을 맞았는지 빵점을 맞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왜이렇게 깔끔하게 지운건지 가끔은 엄마가 미웠다. 그 점수가 너무 궁금해서, 이 문제를 맞았는지 틀렸는지, 맞았다면 나 역시 기필코 맞춰야 했어서, 틀렸다면 반드시 내가 맞추고 이걸 가지고 비난을 해줘야 하므로.
엄마가 아픈 팔로 그토록 반질거리게 지워야만 했던 건, 그와 나에 대한 공평한 사랑을 뜻했음을 다 커서야 알았다.
우리의 생일을 각자 다른 날로 정한 것도 그것으로부터 기인했을 것이다.
나는 양력으로, 그는 음력으로, 우리는 쌍둥인데 생일이 달랐다. 나의 생일엔 나의 생일파티를 했고 그의 생일엔.. 기억이 안나는걸로 보아 지들끼리 밖에서 놀았나보다. 그가 생일을 어떻게 보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북적거리고 그 가운데서 고깔모자를 쓰고 환히 웃는 내 어릴적 생일사진 속에는 엄마의 사랑이 혼령처럼 몰래 함께 찍혀있었다. 여자애라서, 늦게 태어나서 겪을 수 있었을 법한 차등의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야!"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 억울했을 뿐. (지금은 합니다. 야.)
우리는 늘 달랐고, 다르게 살았다. 엄마는 굳이 우리를 합쳐놓지 않았다. 마흔 언저리에 이르고 보니 우리도 합치가 필요한 순간이 있는데, 연습이 전무했던 터라 어색하기 짝이 없다.
뭐 어때. 다 컸잖아. 너도 그리고 나도 엄마한테 사랑받았잖아. 아직도 미운게 있긴 한데, 괜찮아.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됐거든. 아무리 옆에서 차별받았다고 내리 깔아도 나는 알아. 아니, 습득이 아니라 이미 스며들어서 다시 뺄 수가 없어. 엄마의 사랑을 말이야. 다른 사람의 해석을 일리있게 이해해보려 들 필요도 없어.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자식사랑은 다이아몬드 같아서 쪼개지지가 않고 영원하다는 걸 경험할 수 있었어. 사랑은 나눠서 주는 게 아니라 커지는거야. 두배로 세배로, 네배로.
넷째 막내딸이 그토록 염원하던 오늘이 왔다.
생일.
2024 둘째-셋째-첫째의 생일을 거쳐 막내의 생일이 왔다.
<나오늘생일>이라는 머리띠를 쓰고 마주오는 모르는 언니오빠들의 축하를 받으며 500미터의 레드카펫을 밟고 당당히 등원했다.
"오늘은 엄마가 막내 하원시키자마자 바로 키즈카페로 날를거야~ 이른 저녁 먹어야 되는 스케줄이면 알아서 미역국 데워 먹고 가도록!"
"케이크 누가 사와?"
"근데 난 용돈 떨어져서 선물을 못샀어요."
"헐! 너 양심 있음?"
우리집은 아침부터 왁자지껄이 가능하다.
"자, 아무튼 9시에 모입니다. 잘들 다녀와~"
제법 큰 아이들이어서 그렇겠지만 내가 유별나게 막내딸을 애지중지하는 꼴을 시기질투하는 아이는 없다. 다같이 애지중지하고 있기도..
막내의 생일맞이를 하며 큰 아이들의 생일엔 무얼 줬던가 떠올려봤다. 그리고 문득 내가 과연 나의 엄마처럼 재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주었는가 돌아봤다. 한마디 말도 없이, 오롯이 체감한 공평한 사랑을 나는 과연 잘 부어내고 있었는지.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나의 슬픔을 어느덧, 도리어 쓰다듬어주는 아이들의 고운 사랑이 고맙고 미안하다. 단언컨대, 우리의 무딘 일상 속 어디를 들춰도 나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생일에 집중했던 어느 날의 주방에서도, 여기저기서 주워온 교복색깔의 단추에서도, 전기테이프가 칭칭 감긴 게임기의 전선에서도, 그리고 켜켜이 쌓인 편지 안에서도.
평생 부족할 사랑을 하루치씩밖에 채울 수 없는 마음이 어떤 건지 아는가. 아이들의 순간 사이사이마다 내가 있었음을, 스쳐지나가는 시간에도 같이 호흡했음을, 나는 안다. 내가 안다는 만큼의 사랑을 아이들이 알아냈을 때, (그날이 올지는.) 그것이 이들의 삶을 감동적으로 이끌어줄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태어난 막내가 모두에게 사랑을 넘치게 할 오늘 밤 9시. 흘려진 사랑을 열심히 주워모아 더 사랑할 엔진을 만들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