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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Jan 30. 2024

나를 감추기 위해 핑크옷을 입었다.


과한 저녁을 먹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저녁은 늘 포만감 있게 먹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냐고 묻는 이들이 많지만, 이 습관은 이미 오래전부터 몸에 배어 일상이 되었다. 숨소리가 쌕쌕거릴 정도로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배가 부르다는 표시를 해대고 있었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식사 시간과 양에 영향을 받는다. 동방 예의지국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상대가 맛있게 잘 먹고 있는데 먼저 식사를 마치고 숟가락을 '탁' 내려놓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누가 정해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밥상머리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처럼,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선이 분명히 있다. 남편은 대식가다. 그런 그가 요즘 나를 따라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그러다 보니 저녁 시간은 배고픈 좀비 둘이 허겁지겁, 맛을 느껴볼 새도 없이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바쁘다. 덩달아 아이들도 많이 먹게 된다.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 으레 아이에게 시선이 머문다. '그건 아니지. 어른이 식사 중인데.' 과식한 탓에 시원한 밤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따뜻한 공기가 가득한 겨울 거실 안에 있다가는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을 일일이 확인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네 한 바퀴 돌래?" 딸아이를 보며 말했다. 같이 있던 둘째도 "나도, 나도."라고 외쳤다. 그 옆에 있던 강아지 아리도 펄쩍펄쩍 뛰며 산책하고 싶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역시 겨울밤 공기는 차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나 따뜻한 방에 있다가 1층 현관문이 스르륵 열릴 때 '훅'하고 들어오는 찬 공기가 배불러 정신없던 나를 '차렷'하게 만든다. '정신 차렷!' 신이 난 아리는 이미 아파트 입구 쪽으로 달려간다. 덩달아 목줄을 쥐고 있는 아들도 같이 뛴다. 목적지가 없는 산책은 지루하다. 안 그래도 걷기 싫어하는데, 목적지가 없다는 것은 더욱 곤욕이다. "딸, 옷가게나 갈까?" 최근에 동네에 무인 옷가게 두 개가 생겼다. 호기심에 들렀다가 단골이 되었다. 나와 딸, 아들 옷까지 해결할 수 있는 무인천국이다. 가격도 저렴하다. "좋아! 엄마." 요즘들어 옷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목적지가 생기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조금씩 빨라진다. 삶 속에 목표라는 것은 중요하다. 새삼 느낀다.



"신상 왔네." "오, 엄마 이거 봐봐. 내 스타일이야." "너에게 스타일이라는 게 있었나." 예쁘게 말할 줄 모르는 엄마는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엄마, 이거 엄마한테 어울리겠어." 가만히 보니, 핑크핑크 여리여리한 가디건, 사랑스러운 색이다. "그런가? 엄마한테 어울릴까?" 그저께 사둔 리본 헤어핀이 떠오른다. 여성스럽게 올림머리를 하고 리본 헤어핀을 꽂고, 이 핑크 가디건을 입으면 "와우! 천사네."




어느덧 나는 20대에 다니던 대학 캠퍼스 도서관 커피 자판기 앞에 서 있다. 150원짜리 믹스커피를 뽑으며 멀리서 바라보는 한 남학생의 시선을 즐긴다. 부담스럽지만 기분 나쁠 정도는 아니다. 이것이 모두 '그 핑크' 때문, 아니 덕분이다. 대학 때 별명은 '꼴통'이다. 별명만 들어도 내가 어떤 장르의 사람일지 짐작할 것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행색과 언행으로 동기 선배들을 당황하게 했다. 캠퍼스 저 멀리서 "꼴똥아~~~"하고 부르는 이들은 같은 과 사람들이다. 철없어 보이는 남자 동기들과 선배들에게 좀 막대해주었더니, 자기들끼리 키득대며 어느 날 붙여진 별명이다. 1년간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즐거움을 준 꼴통은 일본으로 연수를 간다. "안녕~"



일본에서 돌아온 나는 달라졌다. 눈에 띄게. 혹독한 외로움을 겪으며 말수가 적어졌고, 행동이 얌전해졌다. 캠퍼스에서 만난 선배는 "꼴통아~, 있다 족구 할래?"라고 묻는다. 치마를 입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인지, 족구를 하자고 한다. 연수 후 달라진 나는 청바지보다 치마를 즐겨 입었다. 이것이 모두 '그 핑크' 때문이다. 돈이 없는 유학생은 한국에서 가져온 몇 벌 안 되는 옷으로 연수 생활을 버텨야 했다. 그 속에 엄마가 사준 핑크 원피스가 있었다. "비싸게 준 거야. 아버지가." 특별히 갈 데가 없는 가난한 유학생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공부하러 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확실히. 좋아해 주는 남학생들이 생겼다. 괜히 옆자리에 앉아 공부하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하며, 아르바이트 자리도 열심히 찾아주었다. '핑크' 덕분이다.




이성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게 이렇게 쉬운 것이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말 없이 있으면 착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당시에는 얼핏 배우 오연수를 닮았다는 말도 들을 정도였다. 말을 시작하면 어김없이 '꼴통'이 되지만. 연수를 가기 전에는 공부만 하던 나도, 남자들에게 관심을 듬뿍 받아본 이후로 여성스러워지기로 했다. 평소 멋지다고 생각했던 중문과 남학생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즉 연한 핑크 블라우스에 조금 더 진한 핑크 스커트, 펄이 들어간 핑크 구두를 신고 그의 눈에 띄었다. 걸려들었다고 해야 할까. 여튼, 도서관에서 늘 앞자리에 앉던 그가 조심스레 내민 커피 한 잔에 '역시 핑크'라고 속으로 외쳤다.



종로의 치킨 집 안에서 남자가 말한다. "저는 큰 목소리로 말하고 좀 억세 보이는 여성은 싫어합니다." 지금의 남편이 한 말이다. 그때도 나는 하늘하늘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한 손으로 오른쪽 입가에 묻었을지도 모를 통닭의 양념을 훔치듯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어머, 그러시군요. 호호호호"



아이들과의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옷장 문을 열어본다.

핑크 전멸!!

언제부터인지 나의 보호색을 구매하지 않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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