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훈과 은희는 아파트 공용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 식사를 마쳤다. 레스토랑의 음식을 집으로 배달받을 수도 있지만 오늘은 왠지 사람이 그리운 날이다. 식당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부부처럼 시대의 변화를 모두 지켜본 세대였다. 공용레스토랑의 식사는 개인 맞춤형이다. 아침저녁으로 컨디션을 확인해서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도록 조리해 준다. 이런 세상이 올진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다.
식사를 마친 부부는 아파트 실내 정원을 가볍게 산책했다. 부쩍 말수가 적어진 재훈에게 은희가 가볍게 말을 건넨다.
“봄이어서 그런지 장미가 아주 예쁘게 피었네요. 여보.”
사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실내 정원에는 늘 꽃들로 가득하지만 계절을 대표할만한 꽃을 먼저 피우도록 설계해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응........”
“......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어요? 오늘 통 못 드시는 것 같아서 걱정스럽네요.”
“아니야. 맛있게 잘 먹었어.”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여보, 우리 옛날 앨범 어딨지?”
오래된 앨범을 꺼내 들었다. 무엇이든 소중히 여기는 은희 덕에 세월을 버티고 남은 앨범이다. 겉장을 넘기자 흐릿한 사진 속에서 젊음 하나만으로도 밝게 빛나는 재훈과 은희가 브이를 그리며 짓궂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네, 여보.”
“그러게요. 이때가 언제더라. 한 60년은 더 된 것 같은데요?”
한 장을 더 넘겼다. 30대의 재훈과 은희 곁에는 이제 성인이 되어 독립한 아이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 보인다. 5살이 된 가희와 두 살배기 가은이다.
60여 년 전에 같은 아파트에 살던 이웃집 사람의 사진도 보인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이나 바닷가를 함께 다녔다. 아이들을 같이 키웠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깝게 지낸 사촌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들이었다.
그 시절, 아파트는 단순히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였다. 어울리고 소통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보고 싶다, 그때의 사람들과 그때의 시절이…" 은희가 사진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시간을 거스르고 싶은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재훈과 은희의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알 리 없는 아파트는 고요하기만 하다. 방음, 소음장치를 견고하게 설계한 아파트는 이웃집의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심지어 아이들 울음소리조차도 말이다.
아파트는 우주의 한 공간에 떠다니는 것 같은 정적마저 흐른다. 이 고요함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아파트가 소국가처럼 나뉘어 각자 규칙에 따라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그들은 종종 자신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 가운데에서 종종 혼란스럽다.
재훈과 은희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재훈은 홀로스크린*을 켜고 오랜 친구들의 연락처를 확인한다. 은희는 친구들에게 보낼 초대장 작성을 네오*에게 부탁한다.
"오랜만에 연락하니까 걱정이 되네, 모두 잘 지내고 있겠지?" 은희가 천천히 입을 뗀다.
"네오, 초대장은 모두 갔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기대에 차 있었다.
"네, 은희님. 모든 초대장이 발송되었습니다. 현재 답장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 네오의 음성은 항상 그렇듯이 부드럽고 정확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기계적인 냉정함보다는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의 편리함 속에서도, 친구들과의 만남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로열 아파트는 철저한 보안 시스템과 엄격한 규칙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각 아파트 국마다 자체적인 보안 프로토콜을 갖추고 있어 외부인의 출입을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재훈은 창밖을 바라보며 무언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하늘을 향해 있었지만,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옛날에는 만나고 싶으면 바로 달려갔는데 말이야.....?"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지쳐 보였고, 불만이 섞여 있었다.
"여보, 이번에도 잘 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따뜻하다.
* 홀로 스크린 (Holo-Screen): 홀로그램 기술을 이용한 3D 디스플레이. 공간 어느 곳에서나 홀로그램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으며, 사용자는 가상의 객체를 실제처럼 조작할 수 있다.
*네오컴패니언 (NeoCompanion): 가정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사용자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미래형 컴패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