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쿠아마린 Aug 08. 2021

이토록 황홀한 나무 인문학이 있을까?

김민식의 '나무의 시간'을 읽었다.


 영화를 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무대인 영화 <1917년>이었다. 아카데미상을 놓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경쟁을  벌였던 작품이다.독일군의 유인작전이니 공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하러 가는 두 병사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였다. 두 병사는 전장을 가로질러  블레이크 형이 있는 부대로 떠난다.

블레이크는 영국군 비행기 공격을 받아  비행기와 함께 추락한 독일군을 구하려다 반격을 당해 죽어갔다.

혼자 남은 스코필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국군이 독일군을 공격하기 전에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해야만 한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블레이크 형을 찾아  명령을 전달하고, 블레이크의 유품을 전해 주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초원에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생명을 걸고, 끝내 임무를 완수한 자의 등에 흐르는 저 비애 앞에 어머니처럼 나무가 서 있다. 기어이 걸어가서 나무에 기대앉아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스코필드.

사진 뒤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꼭 살아서 돌아와!> 자막이 올라가도 하염없이 나무를 바라보았다.지친 영혼과 육신을 어루만지는 한 그루 나무의 힘이 위대해 보였다. 영화 속의 외로운 나무는 전쟁터에서 외롭고 지친  병사에게 가족처럼 따뜻한 등을 내어 주고 있었다. 스코필드는 나무에 기대어 위안을 받고 있는 듯했다.

홀로 서서 모진 비바람을 이겨 낸 초원의 나무는 진실로 아름답고 듬직했다.



김민식의< 나무의 시간>을 읽었다. 물건을 찾으려는 전화는 왔지만, 오랜만에 업무에서 벗어나 평화로웠다.

알고 보니 이 책이 대단히 유명했다. 작가 황정미도, 도란서재의 서라언니도 이 책을 가지고 있었다.책을 읽는 동안  찰떡처럼 척 안겨오는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숲속의 안개 길을 걷는 기분이 되었다.

이런 책을 골라 읽게 된 벅참이 내도록 환희를 불러오고 황홀감에 행복했다.옛 추억이 가득한 낡은 서랍을 열자 갇힌 기억들이 무질서하게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나는 내가 아는 나무의 기억에 발목을 잡혀 도무지  어찌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체홉의 귀여운 여인이 되어 내 시야는 그녀를 닮아 오로지 나무만 보였다.그녀처럼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할라치면 나무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마침내 아마기 고개에 다가왔구나싶었을 무렵,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며 매서운 속도로 빗발이산기슭으로부터 나를 뒤쫓아 왔다.나는 스무 살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학생모를 쓰고 감색 바탕의 기모노에 하카마 차림을 하고 학생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에서     


<이즈의 무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이다.

삼나무 숲과 대나무 숲속의 길을 걸어 일감을 찾아가는 무희들의 이야기다. 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간 고등학생은 어린 무희에 반해 그들의 뒤를 뒤쫓으며 마침내 그들과 합류를 한다.그리고 포구에서 헤어지지까지의 며칠 동안을 일본인의 정서를 흐르는 불빛처럼 은근하게 묘사해 놓았다.어린 무희가 고등학생을 포구에서 떠나보내며 몰래 우는 모습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또 다른 작품 <설국>에서 열차 창문에 비치는 요오꼬의 모습처럼 애처로웠다. 밤기차 차창으로 거울처럼 비쳐 흐르던 요오꼬의 얼굴이, 밖의 불빛과 겹쳐 보일 때의 그 처연한 아름다움이,  어린 무희에게서도 빛났다.


김민식 저자는 이 단편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심장을 떨리게 한다고 했다.<이즈의 무희>보다 섬세한 글을 읽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즈반도 가파른 등성에 서 있는 삼나무, 대나무 잎의 푸른색에다 숲에스치는 바람소리까지 들린다고 썼다.

표지에 <나무 보헤미안과 세상 속 나무를 여행하다>라고 소개되어 있다.그는 보헤미안이란 수식어가 전혀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다.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과 지식, 예술을 향한 범상치 않은 안목이 특히 그렇다.

그가 뿜어내는 나무 이야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밤마다 신비한 이야기를 수놓는 세헤라자드의 아라비안나이트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무를 주체로 연결하는 그의 달변에 시선이  활자 위를 춤추듯 굴러간다.

흥미진진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40년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빈 여정 덕분이다. 장장 400만 km를 누볐다.


1970년대 그는 수출 전선의 종합 상사맨이었다. 합판을 수출했다. 자부심이 대단했던 김민식은 형편없는 한국 상품의 위치에 실망을 했다.영국의 합판 가격은 한국의 것보다 1000배가 비쌌다.그는 절망했고, 망망했다. 

그때부터 그는 합판이든 원목이든 목재가 사용된 것을 보면 제조사를 추적하고 나무의 원산지를 살폈다. 

그리고 40년 동안 목재 딜러와 목재 컨설턴트로 일했다. 세계 어디든 나무가 탐나면 달려갔다.


그는 문명과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나무의  풍족과 지속적인 남벌에서 찾았다. 사막화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는 풍부한 목재자원이 찬란한 초기 문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목재자원이 부족해지면서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각종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삼림이 필요했으며, 나무가 부족하자 선박을 건조하지 못하게 되었다. 로마는 이집트와 시칠리아로부터 식량을 운송 받을 배를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숲에서 온 사람들'로 불리던 게르만족에 의해 로마는 망했다.결국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따른다'라고  썼다.



질문을 해보겠다.

당신은 침엽수와 활엽수 중 어느 것이 단단하다고 생각하는가? 활엽수라 생각한 당신은 나무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다. 온대지방이나 열대우림에 자라는 나무와  주로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 중 어느 나무가 치밀하며 단단하겠는가? 우리의 대답은 추운 지방이다. 그러나 아니다. 학창시설,  지리 선생님의 이런 질문에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제비처럼  입을 열었었다.

' 추운 지방이요~~~"

기온이 높은 지방의 나무가 빨리 자라면서도 치밀하고  단단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가장 치밀하고 단단하다.



단풍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호두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자작나무, 열대지방의 티크, 로즈우드, 흑단, 마호가니는 활엽수다. 활엽수는 hardwood 라고 부르며, 침엽수는 softwood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나무의 성질이 알 수 있다. 물론 오동나무처럼 무르고 약한 활엽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활엽수는 소나무보다 단단하다. 우리나라는 소나무를 최고의 나무라 여긴다.



잣나무는 홍송이라고 한단다. 잣나무를  korean pine 으로 쓴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국토종이라 알고 있는 적송의 영어 표현은 Japanese red pine이단다.홍송은 문살에 많이 쓰였다 . 단종비가 잠든 사릉의 재실문이다. <나무의 시간>을 생각하며, 저물어 가는 사릉의 재실문 앞에 오래 있었다.



전통 한옥은 소나무로 지어야 제맛이며 격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나무에 집착하는 우리의 정서는 소나무의 가격을 올려놓았다. 지구상에 자라고 있는 나무의 80%가 침엽수이고, 20%가 활엽수다. 양이 많으니 국제간 거래에서 침엽수는 가걱이 싸다. 활엽수는 비싸며, 귀한 대접을 받는데 이유는 수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침엽수 중에서도 습기에 약하다. 우리의 전통 건물이  제대로 보존되어 전해오지 못한 이유가 습기에 약하고 쉽게 썩는 소나무를 사용해서이다. 우리의 사랑,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느티나무를 썼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소나무가  아닌 참나무를 사용하여 지은 사찰이다. 팔만대장경에 사용된 나무는 거의 가야산 부근의 산벚나무였으며, 돌배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고로쇠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의 담임이셨던 김동진 선생님은 특유의 언성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몽고를 물리치기 위해 나무를 몇 년만 강화도  바닷물에 잠기게 했다가 건져내어 건조하는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불경을 새겼다고 하셨다.

최근 밝혀진 나무의 산지는 해인사 부근의 가야산이었으니, 강화도 바닷물 운운은 근거가 없다 한다.



문인을 좋아하는 내게 <박경리 선생의 느티나무 좌탁> 대목은, 박경리 선생의 모습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오죽(烏竹)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던 선생의 안방 창은 토지 속의 윤 씨 부인이 준엄하게 앉아 있을  것만 같게 격조가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오죽의 모습이 창호에 여실히 비쳤을 수많은 날. 그걸  지켜보며 토지를 집필하고, 사위 김지하의 옥살이 뒷바라지를 했을 선생의 마음은 어땠을까.

김민식은 세계 문인들의 책상을 보면서 부러웠다고 고백한다.

찰스 디킨스의 마호가니 원탁 테이블이 경매물에 나와 중국인 수집가에게 낙찰이 되자 예술부 장관이 반출을 금지시켜 버렸다.이유는 "국가 이익을 위하여 디킨스의 원탁 테이블을 지킨다"였다.

톨스토이의 자작나무 책상, <유혹하는 글쓰기>의 스티븐 킹의 오크나무 책상, <정글북>의 작가 키플링이 쓰던 런던 호텔의 벚나무 책상,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박한 느티나무 책상.이들의 책상은 모두 원목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왜 우리 문인들은 이런 책상이 없을까? 열등감이 들었다고 했다.



박경리 선생이 느타나무 교자상에서 글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주 토지 문학관으로 달려갔단다. 선생이 직접 주문하였다는 교자상은 정말 원목이었고, 느티나무임을 확인했단다. 터지고 벌어진 곳이 많은 느티나무 교자상을 대한 김민식은 오랜 부러움이 사라졌다고 썼다. 그의 콤플렉스를 잠재운 박경리 선생의 느티나무 교자상은 어떤 나뭇결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고, 이런 안목을 가진 김민식 고문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김민식의 현재 직함은 내촌 목공소 고문이다. 내촌 목공소는 괴짜 목수로 이름을 날린 이정섭이 운영하는 곳이다. 서울대 미대를 나와 목수일을 배워 집을 짓다가,  나무로 된 소품도 만들어 보자고 만든 가구에 그가 반해 버렸다. 그의 가구에는  가공의 흔적과 장식적인 요소가 없어 더 감동적이다. 나무의 결을 최대한 살리되, 비례와 조형미,균형에 역점을 두었다. 무엇보다 그의 가구는 간결하다. 생각의 양과 시간의 값이 스며든 그의 가구는 비싸다고 소문이 나 있다.물론, 비싼 나무를 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정섭의 의자. 너무 간결하고 소박해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내 어린 날의 한 시절이 오두마니 앉아 있는 듯.



이정섭의 가구는 재벌들이 가장 좋아한단다. 이정섭은 내촌에서 집을 지어 팔기도 한다.

김민식의 집도 이정섭이 지었다.내촌 목공소에 가고 싶다. 남양주 바로 옆 마을, 포천에도 내촌이 있지만 내촌 목공소는 홍천에 있다. 토요일에만 방문할 수 있으며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운 곳처럼 가고 싶은 장소가 하나 생겼다.

김민식의 해설과 이정섭의 집과 가구를 보고 싶다.

<나무의 시간>을 읽는 내내 티끌 하나 없이  나는 완전히  행복했다.


결핍의 그늘이 스르르 무너지는 느낌에다, 가슴엔 뭉근한 부드러움의 무언가가

가득했다.  나는 모르겠다. 그 느낌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를.

아무튼, 토속적인 평화가 내 안에 있었다.

울울창창한 산림 속의 수액이 내  결핍의 찌꺼기를 몰아낸 듯싶다.

강건하게 발 딛고 선 내 몸뚱어리에, 가장 순결한 수액이 가득 차 올랐다.

나는 한 그루 나무를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관리비를 왜 내가 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