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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쿠아마린 Aug 10. 2021

능내역에서 마음의 빈터가 보였다

이젠 폐역이 된 능내역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건너편 산그늘이 강에 길게 누워 있고, 강변의 초록 버드나무 반영이

강 속에서 추상화처럼 일렁거린다. 검푸른 강물 위로 이름 모를 새들이 짝을 지어  날아갔다.

이쪽은 남양주시, 강 건너는 광주시다. 농담을 달리 한 초록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고 있다. 지루한 초록색의 여름 풍경을 이상(李箱)은 이렇게 말했다.  ' 지구 표면적의 100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 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 무미한 채색이다.' 권태스러운  이 초록의 공포는 얼마 사이에 그리움의 대상이 될 게 빤하다.



두물머리를 들러 돌아오는 길에 언뜻, 골목 사이로 <능내>란 표식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무수히 이 길을 오갔지만, 사실 <능내역>이 어디쯤에 있는지 모르고 살았다. 언제 맘먹고 찾아가야지.. 만 했던 곳이 전혀 상상도 못 한 골목길 사이에서 스치듯 보인 것이다.

돌아온 길로 차를 돌렸다. 지나온 길임에도 여기였나? 했을 정도로 비좁은 골목 틈으로 <능내>라는 빛바랜 표식이 기와집에 달려 있다.


주변에 차를 세우고 도로를 건너니 저 안내판이 높다랗게 서 있다. 처음 본다. 1956년부터 2008년까지 이곳을 오갔을 사람들. 이 역은 용문까지 전철화가 되면서 폐역이 되었고, <운길산> 역이 대신 생겼다.



골목 사이로 들어서니 <바라보다> 카페가 왼 편에 있고,  폐역의 뒷모습이 보인다. 역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지나간 것들과 오래된 것들 사이에서 젊음이 더 빛나 보이는 장소다. 여기에서 저들의 추억도 폐쇄된 역과 함께 저물어가는 세월이 있을 것이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기차역으로 팔당역과 양수역 사이에 있다. 1956년 5월 1일 무배차간이역(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1967년 보통역으로 승격하였다가, 1993년 배차간이역(역무원이 있는 간이역)로 격하되었고, 2001년 신호장으로 변경되었다.2008년 12월 중앙선의 노선이 국수역까지 연장되면서 선로가 이설되어 폐역되었다.  이 역을 대신하여 근처 진중리에 운길산역이 신설되었다.역은 기념물로만 남아있으며 일부 철길도 남아 보존되고 있다. 역앞은 자전거길이 지나고 인근에 다산유적지가 있다.


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봄빛에 졸고 있다. 이 나른한 아름다움을 나는 비로소 오늘에야  찾아 들어왔다.

교통이 비교적 좋은 곳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사실 기차를 몇 번 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쪽 마을은 중학교가 없으며 고등학교도 가까이 있지 않다. 이 부근에 사는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우리 중학교에 다니기도 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우리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이 아이들을 통틀어 우리는 <능내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팔당과 덕소를 지나 도농역에서 하차를 했다. 기차 시간에 맞추어 학교를 오다 보니 이들의 등교는 빨랐고 하교시간엔 또 빠른 걸음으로 역을 향해 걸어갔다.



중학교 때 늘 졸던 아이도 <능내>의 아이들이었고, 정약용이 누군지  몰랐으나 그의 후손들과 함께 공부를 했던 것이다. 아담한 역사 내부엔 이 역을 배경으로 찍은 빛바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혹시라도,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찾아보았다. 역사 벽에 기대어 나란히 놓인 작은 의자들. 올망졸망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던 우리의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보이는 곳이다. 지나온 것들엔 왜 이렇게 더께처럼 아픔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폐역이라는 단어와 능내역이라는 단어, 그리고 퇴락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아프다.


활기찬 젊은이들의 걸음과 대조를 이루는 이곳. 그렇다, 이 지역 학생들을 위해서였던가? 우리 학교에 스쿨버스가 생겼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마도 기차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비록 얼마 가지 못했으나 아이들은 관광차 크기의 빨간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고 갔다.


중학교 시절, 운동회를 대비하여 무용 연습이 한창일 때, 한 아이가 유난히 교무실로 불려 나갔다. 아이는 쭈뼛거리며 입을 쪽 빼 어물고 교무실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아이라고 주변에서 소곤거렸다. 그 아이의 집이  능내였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이는 내 앞에 앉았다. 고전무용을 했고,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면 춤을 췄다. 그 시절 나는 내 짝에게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짝은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앞에 앉은 아이가 어느 날,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듯 이야기를 했다. 나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알아챘다.

중학교 시절 교무실로 불려 간 사실을 아니까!

"넌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것 같아"

쏟아 낸 이야기는 자신의 가출을 타인의 경험으로 대치하여 들려주고 있었다. 아이는 내 앞에 앉아서 내 짝꿍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등 뒤로 들었던 것이다.  단지, 책 내용만, 혹은 드라마의 줄거리만 이야기해 줄 뿐이었는데 나를 순진하지 않은, 선데이 서울에 나올 법한 스토리의 주인공쯤으로 여긴 건 아니었을까? 당시 고대 법대를 나와, 영어 선생님이 된 윤 선생님의 말을 나는 신양처럼 지키고 있었는데..

"선데이 서울 같은 책은 쳐다도 보면 안 돼요"


"어떤 아이가 있었어!"

스쿨버스 아저씨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중1인데 아저씨를 따라 가출을 감행했다. 그 나이에 스쿨버스 아저씨가 멋져 보이거나,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는 호의를 사랑으로 생각했을까? 그녀는 귀가를 하고도 꽤 방황을 했다. 또래에 맞지 않는 성숙의 속도가 청춘을 아프게 했고, 그녀는 늘 위태위태 해 보였다. 멋진 선생님 앞에서 교태스럽게 웃는 웃음소리마저 어딘가 공허했다. 고1 여학생이 교실에서 선생님을 향해 화답하는 웃음이 아닌 게 소름 끼쳤다. 웃음소리에도 자격이 있다면, 그녀의 웃음소리는 여학생의 교실에선 불손했다.


고1 여름방학이 끝났을 때 아이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추억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선  대합실.

어린 시절이라면 드넓어 보였을 이 공간이 이제 다 자란 어른의 눈엔 아담한 골방으로 보인다.

다 자라서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그 아이가 집에 왔다며 능내를 가보자고 말한 건 짝꿍이었다. 하교 후, 어둑해진 길을 166번 호수 여객 버스를 타고 어디선가 내렸다. 주변에 논이 있었고, 어딘지 분간이 안 되는 곳이었다. 지금도 어디였는지 전혀 짐작이 안 되는 곳에 그 아이의 집이 있었다. 부모님은 가게를 하고 계셨다. 내 짝과 소곤대며  흘러나온 소리를 근거로, '이 아이는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구나' 생각했다.

어른의 세계에 별 관심이 없고,  아직 멋모르는 학생인 것이 좋았던 나는 아무런 궁금증도 호기심도 없었다.

돌아오려는 우리에게 아이는 매달렸다.

"내가 밥을 해서 꼭 먹여주고 싶어. 제발 먹고 가!"

우린 그녀의 뜻을 따랐고, 버스정거장까지 따라 나와 버스 꽁무니에서 손을 흔들었다. 가로등 없는 정거장 주변은 먹빛 옷을 입고 있었다. 주변은 어둠의 망망대해였다.

다음날, 그녀의 엄마가  학교에 왔다. 우린 옥상으로 올라가 엄마를 뵈었다. 눈이 젖어 있었다.

우리를 배웅하러 나왔던 그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그녀는, 부모님이  자기에게 보여주는 관심이 부담스럽다고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떠났고, 우리는 그녀를 잊어갔다.

오늘, 이젠 폐역이 된 이곳에서 그녀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행복한 여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는 총각인 체육선생님 앞에서 제일 크게 웃었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현대인들은 머리를 숙인 채, 스마트 폰에서 눈을 거두지 못한다.

서글픈 감정이 솟아올라 한 줌의 눈물을 던질 난로는 없지만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가 떠올라 짐짓 마음에 그늘이 내려왔다.


능내역은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으로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이 작은 간이역. 작은 추억의 역은 이렇게 그 자리에 서 있다. 변한 건 우리다.


옛적, 철길의 침목을 닫고 한 칸 한 칸 걷다 보면 거리가 단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도농역 철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엔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역사를 나와 멀리 바라보는 간이역. 나의 아름다운 시절이 저기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카페로 꾸며진 기차  한 칸. 지금은 굳게 닫혀 있다.

시간이 정지된 채 이 역의  풍경이 된 기차 카페.


밥은 먹었니? 쌍시옷 받침이 떨어졌다. 낡은 창틀과 정적이 앉아있는 벤치. 이런 장소 너무 좋다.

심쿵. 언제 느긋하게 사진 찍으러 오고 싶은 곳이다.


오늘 처음 알았다. 역의 철길을 건너면 자전거길이다. 이 자전거길은  서울에서도 구리시에서도 진접에서도 올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 오늘 연결되지 않은 조각들을 끼워 맞추듯 마음속으로 길들을 연결해 보았다.



역을 뒤에 두고 떠나오는 길에 골목길을 엿보니 이런 벽화가 있다. 우리 시절엔 들판에 나가서도 야외 전축에 음악을 틀어놓고 저렇게 춤을 추고 놀았다. 큰 집에 가면 전축판 깨진 부스러기가 수북했다. 삼촌이나 사촌 오빠들이 혼난 증거품이었다.            


잠시 <봉주르>를 둘러보고  계약서를 쓰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셀 수도 없이 지나다닌 길에서 오늘에야 눈에 보인 간이역. 덕분에 오늘 잊힌 친구를 떠올려 보았다. 폐역이 된 간이역 덕분이다.

서로의 마음에서 이미 폐역이 된 그녀와 나. 나는 처음 들른 능내 폐역에서 내 간이역의 한 순간을 스쳐지나 간

옛 친구를 생각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남겨두기 때문이라고 조지 오웰이 말했다. 쓸모를 다 해, 이제는 폐역이 된 능내역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생각하며 내 숨결을 보태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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